일본의 와타나베 쿠오키의 마츠시마(松島)에 대한 혼동

1876년 일본문서에는 일본인 관리의 1876년도 영토인식이 나타나 있다.
 獨島 竹島 dokdo takeshima 메이지 정부가 독도를 병합하기 이전의 정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후반 문서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몇가지 점에서 일본정부가 믿게하려는 것과는 반대의 내용을 보이고 있다. 다음의 1878년 문서는 외무성 와타나베 쿠오키가 조사한 “마츠시마 ( Matsushima – 松島 )” 소유권에 관한 내용이다.

“와타나베 쿠오키는 누구인가..?”

오른쪽의 와타나베 쿠오키 (Watanabe Kuoki : 渡辺洪基)는, 1878년 일본의 외무성 문서국장이었다. 다음의 문서는 무토 헤이가쿠 (武藤平学)가 정부에 제출한 청원으로 독도 관련 섬에 대하여 일본정부의 상세한 진행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조선의 울릉도)를 개척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또한 이 사람이 어떻게 그 직후에 일본 전함 아마기(Amagi)호의 측량에 혼동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 19세기 독도지도의 오류 )

와타나베 쿠오키의 (渡辺洪基) 원본 기록과 영문 번역

메이지 일본의 마츠시마 혼동 기록 1메이지 일본의 마츠시마 혼동 기록 2메이지 일본의 마츠시마 혼동 기록 3일본의 마츠시마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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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 관한 고찰.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 관한 논의된 기록이 없었던 일찍부터 다케시마 (울릉도)에 관한 몇 가지 간단한 문서가 발견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 관해서 말을 더 많이 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들의 의견은 나뉘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 두 섬들이 하나라고 말하고 두 개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두 개의 다른 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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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시마 (울릉도) 는 장차 우리의 편의를 추구하던 막부에 의하여 조선에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소위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가 다케시마 (울릉도)로 밝혀진다면 그 섬은 조선에 속할 것이며 그리고 일본의 소유가 아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그 명확한 대답을 줄 수 없다.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의 위치는 중요한데 그 이유는 조선 그리고 일본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나가사키-블라디보스톡, 시모노세키-원산 항은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의 중요한 위치 때문에 영국 그리고 러시아 전함들은 반복해서 이 인근을 자주 출몰하였다. 따라서 이 섬이 일본의 일부라면 우리는 매우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페이지 3.
“…비록 그것이 조선에 속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보호해야만 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을 때 혼란이 생기게 된다. 주인없이 버려진 이 섬. 몇 몇 기록에서는 “아르고노(Argonaut)”는 다케시마 (울릉도) 의 서쪽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쥬레(Dagelet)”는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라고 부르는데, 다케시마 또는 울릉도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우리가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독도)라고 부르는 섬은 서양의 호르넷 바위(Hornet Rocks)이다.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울릉도)라고 할 때 실제로 서양 사람들은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것 같다. 외국지도에는 이것이 “호르넷 바위(Hornet Rocks)이다. 일본의 판단으로는. 여러 나라들 간에 두 섬들에 대한 통일된 의견은 없다…”

페이지 4.
“……논쟁에서 완전한 근거는 없다. 따라서 토지와 그리고 그 인근은 측량되어 어느쪽에 속하는지 밝혀야 하며, 따라서 그 판단에 따라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마네현에 조사를 의뢰하여 그들의 이전 정책을 확정하고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조사주도권을 잡아야 한다. 만약 조선이 이미 시작하였다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가능한 한 빨리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긴급히 허락하여 주소서…”

와타나베 쿠오키 (渡辺洪基)의 문서 내용 요약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에 관한 와타나베 쿠오키 문서 분석
위 문서에서 얻어 낼 수 있는 몇가지 진실은 이 시대에 메이지 정부의 독도에 관한 태도이다.
일본인 “학자들”은 메이지 정부 문서에서 다케시마 그리고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가 조선 영토라고 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메이지 정부는 어느 섬이 어느 섬인지 혼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와타나베 쿠오키의 위 언급은 “아르고노(Argonaut) 섬”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나타낸 문서가 많이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일본인들은 울릉도였던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는 원래 다케시마였고 그리고 외국명칭 “호르넷 바위(Hornet Rocks)”들은 일본인들이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 독도라고 하던 섬이다.
심지어 19 세기 말 경에도 일본인들은 독도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 공식서간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원래 일본영토라고 주장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외무성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인가 아닌가를 주장하기 위하여 참고로 제시한 외국지도들은 일본의 독도에 대한 주장이 역사적으로 19세기 말 시점에서 합법적인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20 년 후 일본이 독도를 병합하는 동기는 이 공식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이 독도를 침탈하기 20 년 전에 이 문서는 작은 바위로 이루어진 이 섬이 왜 일본에게 중요했던가를 보여준다. 와타나베 쿠오키 단지 이 지역에 해군을 주둔시킬 것을 주장하고 일본이 한국 해협에서 활동을 관찰하고 통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외국 전함들에 관해 언급하였다.

이 맥락에서 혼란스런 내용은 “비록 이 섬이 타국(조선)에 속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언급은 일본 고위관리들이 누가 이 섬의 소유권을 가졌던 간에 인접 섬들에 대한 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와타나베 쿠오키의 태도는 최종적으로 1904년 이 지역에서 해군의 충돌이 발생하고 그리고 1905년 일본이 독도를 병합함으로서 실증되게 된다. ( 일본 군대 독도 합병에 관한 일본의 다케시마 X-파일 시리즈를 보기 바람 ) )

17 세기 후반 일본정부는 울릉도가 조선 영토의 일부라고 간주했다.( 여기 1695년 돗토리 막부 기록을 보기 바람 ) 와타나베 쿠오키의 문서 앞부분에서 의견을 보면 일본 고위관리들이 울릉도가 조선의 합법적 땅임을 묵인했다는 것을 후회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와타나베 쿠오키의 혼동은 왜 생겼는가..?”
 獨島 竹島 리앙쿠르 독도 다케시마 바위섬오른쪽 1872년 Weller가 그린 지도는 와타나베 쿠오키가 위 문서에서 언급한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그가 영국지도를 가장 많이 인용한 것을 알고 있는데, 그는 영어명칭 “호르넷 바위(Hornet Rocks)”가 이 지도에서 독도를 동해(일본해)에서 세 개의 섬이라는 잘못 알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케시마”라고 그려진 이 지도 섬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애매하게 대쉬로 그려진 선들이다. 이것은 존재가 의심스럽다고 생각되는 섬들을 지적하는 일반적인 지도제작법이다. 이 그림은 호르넷 바위(Hornet Rocks)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 – 독도) 가 일본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904~1905 러일전쟁 이전 25 년 동안 일본이 이 섬들을 병합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 여기 한국 땅에서 일본의 군대 주둔지 그리고 독도 시리즈를 보기 바람 )

이러한 잘못 때문에, 일본 전함 아마기(Amagi)는 이 지역에 대한 측량을 시작한다. 여기에서 밝힌 것은 지역에는 섬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래서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 그리고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 문제는 빠지게 된다.

오늘날 어떤 일본인 로비스트들은 와타나베 쿠오키의 견해는 대체로 일본정부의 대표적인 견해이지만 실제로는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와타나베 쿠오키는 일본외무성의 책임자가 아니라 기록국의 단순한 관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부정확한 외국지도를 근거로 추측을 한것 뿐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동해(일본해)에 3 개의 섬이 있다고 잘못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울릉도와 독도 이외에 섬이 있을 가능성에 대한 와타나베 쿠오키의 의견은 당시 일본정부 관리들의 소수 관점이었다. 예를 들면, 당시 외무성 대외연락관 타나베 다이이치는 처음부터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는 울릉도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찬반 양론 중에 다이이치는 만약 마츠시마가 우산도라면 그런 발상은 용인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다른 관리는 만약 마츠시마(Matsushima -松島)가 조선에 속한다고 하면 그것은 침략행위와 다름없다고 하였다.

이때 와타나베 쿠오키는 시마네현의 관청에게 그들의 과거 독도 정책을 확정지을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그는 대장성의 최근 문서를 보여주면서 ( ( 1877년 공문록(公文錄) 문서를 보기바람 )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소유이며 그리고 메이지 정부는 그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최종적으로 일본 전함 아마기(Amagi)는 울릉도 지역을 측량하였지만, 그들은 다케시마가 울릉도의 이웃섬인 죽도(竹島) 다케시마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그리고 일본은 계속해서 일본의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하였다. 일본인 기록에서는 지속적으로 독도가 강원도의 일부이며 조선의 인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간주하였다. ( 20세기 독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