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음 기록은 아직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오른쪽 지도는 한국의 동해안, 울릉도, 독도 그리고 일본의 서쪽 해안의 전체적인 지도다.
메이지 정부 내무성 초기에 일본은 전체 일본의 현 지도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물론 일본의 시마네현 그리고 오키섬과 일본의 가장 서쪽 지역도 이 과정에 포함된다.
1877년에 시마네현은 내무성에 울릉도 그리고 또 다른 섬(독도)가 일본의 행정관할에 포함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질의를 한다. 이 조사 목적은 일본지도를 작성하기 전에 포함시킬 영토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메이지 정부 질의 문서들 그리고 번역
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해 다케시마 그리고 “다른 한 섬” 토지에 관한 질의…”
“…마네현은 다케시마 관할에 대한 판단을 위하여 첨부서류와 함께 우리에게 질의를 해왔는데 본부는 이 건을 심의하였다. 문제시되는 섬에 관하여, 그 섬들은 원록(元祿) 9년(1696) 1월 달, 한국인들이 섬으로 들어온 이후 준비된 문서에서 우리 나라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이전의 정부의 심의의 목적 2. 공식 통역의 통지 3. 개입된 나라들 간의 공식서간 4. 우리 나라의 회신 그리고 언급. 다시 말하면 元祿 12년, 문서 교환은 끝났다. 그러나, 영토의 획득 또는 제외는 중요한 사항이므로, 우리는 문서 첨부된 것과 함께 귀하의 지시를 기다리는 바입니다. 메이지 10년 3월 17일. 내무성장관 오쿠보 도시미치 대리 내무성 차관 메이지마 호시카…”
질의에 대한 태정관 (일본의 최고 관직)의 답변:
질의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다케시마 그리고 “다른 한 섬”은 우리 나라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문서와 관련된 분쟁 지역은 “다른 한 섬” 문구의 모호성이다. 이는 모두 울릉도 그리고 “인접한” 섬을 기술한 첨부된 문서들이다. 첨부된 지도 그리고 문서들 아래와 같이 번역된다.
“…磯竹島(이소 다케시마)는 竹島(다케시마)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오키 국(隱岐國) 북서쪽에 있으며 위치는 오키에서 120 리(里)이다. 주변둘레는 10리 (里)이다. 거기에는 가파른 산이 있고 들판이 드물다. 거기에는 3개의 시내가 있고 폭포도 있다. 그러나, 개울의 시발점은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골짜기가 너무 깊기 때문이며 숲이 우거지고 대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언듯 보이는 나무들은 고려송, 향나무, 황벽나무, 동백나무, 참나무, 오동나무, 피나무, 일본송, 대나무, 조릿대, 야생당근, 부추, 머위, 생강, 우도, 백합, 우엉, 보리수, 복분자, 왕호장근, 층층나무가 있다.
동물들은 강치, 고양이, 쥐, 여러 종의 박새, 비둘기, 야생오리, 직박구리, 방울새, 야생오리, 집쥐, 제비, 검독수리, 독수리, 매, 갈매기, 큰 박새 등이다. 그리고 진사(辰砂)와 공작석이 난다. 어류들과 패류들은 너무 많아 다 열거할 수가 없다. (섬)에는 강치와 전복이 난다. 전복을 잡기 위해서는, 저녁에 바다에 대나무를 드리우고 아침이 되면 전복은 대나무 잎에 붙어있다. 맛은 아주 좋다. 그리고 우리는 강치로부터 기름 몇 말(斗)을 얻었다.
다음으로 “또 다른 섬” 마츠시마(松島 -독도)는 주변둘레 30 町, 그것은 竹島(울릉도) 가는 도중에 있다. 오키에서 거리는 80리(里). 나무와 대나무가 드물게 있다. 섬에서는 어류들과 강치가 역시 생산된다.
永祿 시대에 상인 오야 진키치(大屋甚吉) [후에 이름을 바꾸어 大谷라한다]는 伯耆國 會見郡 米子町 (현 돗토리 현 요나고 시)에 살았으며 에치코(越後; 니이카다 현)로부터 돌아오는 도중에 태풍을 만나 울릉도에 기착하였다. 그는 전체 섬을 조사하고 어류들이 풍부하고 패류들이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귀국한 날, 요나고성 검시관 아베 시로 고로에게 그 취지를 신청해 이후, 항해를 신청했다. 아베씨가 에도에 소개하고, (도해) 허가서를 얻었다. 元和 4년(1618) 5월 16일의 일이다…”
이 문서 어떤 부분에도 울릉도와 독도 이외에 어떤 섬도 언급한 것을 볼 수 없다.
위의 3가지 문서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히 설명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제외된 “다른 한 섬”을 찾을 수 없다. 내무성의 질의 후에 인쇄된 일본지도에는 일관되게 첨부된 일본 지도에서 제외된다.(아래를 보시오)
1877년 공문록 문서
1877년 문서는 첨부된 울릉도와 독도지도를 보여준다. 지도는 약 35cm (14inches) 크기로 매우 작다. 울릉도 모양은 왜곡되어 있으나,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독도의 모양은 매우 분명하다. 이 지도는 동해에 있는 섬들의 존재를 메이지 정부가 혼동하였다는 몇 몇 일본인의 주장을 의심케 한다.
더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일본인은 그들의 입장에 대하여 혼동하였다는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울릉도까지 거리는 약 50리라는 것이다. 해리는 이 지도에서 사용되는데. 이 지도는 1800년대 중반에 부정확한 동쪽 거의 같은 위치에 울릉도를 적당히 잘못 위치하여 제작된 것이다. 그것은 역시 매우 오래된 기록에서 위치를 잡은 것일 수 있다.
왼쪽 위: 시마네현 조사에 포함된 1877년 전체 지도입니다. 한국의 동해안, 울릉도, 다케시마(독도), 오키 제도의 서해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위: 지도 오른쪽 아래에는 오키섬과 다케시마가 표시됩니다. 오키섬에서 다케시마까지의 거리는 80리이며, 두 섬 사이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지역 논쟁은 울릉도 인접한 섬에 관한 설명이다. 일본인들은 문서의 최초 질의에서 언급한 “다른 한 섬”에 관한 특징을 주장한다. 이는 몇 가지 이유로 가능성이 거의 없다. 첫째, 언급한 바처럼 이 지도는 매우 작다. 울릉도의 서쪽 섬은 약 1센티로 크기를 잡았고 거의 판독하기 어렵다.
지도에서 중요하지 않은 모습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부속된 문서에서 설명되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울릉도에 가까운 두 번째 이웃한 섬 그리고 작은 크기의 섬은 영토 소유권에 대한 질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직 이 문서에서 언급한 중요한 “다른 한 섬” 문구는 독도(마츠시마-松島))이다.
왼쪽 위: 울릉도와 독도가 표시된 1877년 지도를 클로즈업한 모습. 오른쪽 위: 당시 마쓰시마라고 불렸던 다케시마(독도)의 클로즈업. 두 섬의 정확한 형태를 보여줍니다. 또한 울릉도가 다케시마에서 40리 떨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1877 공문록 문서 이후 시마네현 지도
언급한 바와 같이, 내무성의 질의의 전반적인 목적은 표시한 섬들이 시마네 현에 소속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만약 독도가 시마네현의 일부였다면, 그 섬은 확실히 1877 이후에 인쇄된 지도에 포함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마네현 지도에는 어떤 것도 그것을 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 일본 지도는 지속적으로 오키섬이 일본의 가장 서쪽 땅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일본 지도는 심지어 일본의 서해안의 미노시마 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일관되게 한국의 독도를 제외하고 있다.
왼쪽 위: 1878년 시마네현 지도에는 울릉도나 독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다는 문의에 대한 답변. 오른쪽 위: 이 근대 동해 지도의 박스형 영역은 위치 참조를 위해 시마네현의 위치를 표시한 것입니다.
위 왼쪽: 1891년 시마네현 지도에 오키 섬이 보이지만, 그러나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위 오른쪽: 1895년 시마네현 지도는 오키의 서쪽 섬들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클릭)
위 왼쪽: 1891년에 인쇄된 그림은 오키를 일본영역으로 넣고 있다. 오른쪽 경계에 작은 미노섬을 보라. 위 왼쪽: 이 색상이 칠해진 시마네 지도 는 오키섬(위에 빨간 색)을 일본의 경계로 넣고 있다. (이미지 클릭)
1881년 일본은 모든 현의 지도를 그렸다. 지도 위 오른쪽은 시마네현이다. 또한 오키 섬은 포함되었지만, 독도 그리고 울릉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지도 위는 각 현이 포함된 전국지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여기에 독도는 분명히 일본의 일부로 포함되지 않았다.(이미지클릭 )
공문록 문서들에서 독도가 일본영토에서 제외된 것을 더 지지하는 해석이 이 지도와 문서들이다. 왼쪽 위는 내무성의 질의 응답 후에 만든 3개의 시마네현 지도들이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시마네현은 마츠시마(松島-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위 오른쪽 옆은 1887년에 발간된 일본어업에 관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시마네현 오키구에 관한 것, 그리고 오키 섬에 관한 것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 이 문서는 이 지역의 영역으로 오키 섬을 규정하고 있다.
이 설명 어디에서도 독도가 시마네 또는 오키 지역의 일부라고 언급한 곳은 없다. 여기서 다시 그것은 명백히 일본은 독도가 시마네 소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일본의 영토일부가 아니다.
일본의 1877년 공문록 문서들의 사실에 근거한 결론
요약하면, 일본 외무성은 독도는 일본 고대로부터 고유한 영토라는 단호한 입장을 취해왔다. 이는 17 세기에서부터 메이지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단순히 1905년 러일전쟁 동안 일본이 독도를 병합하기 전까지 자체지도 그리고 문서들에서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독도를 시마네현에서 제외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간단하게 말해 진실이 아니다.
일본 시마네현의 질의 그리고 내무성의 응답은 오키 섬 그리고 미노시마 이외에 일본의 시마네현에 속하는 섬은 없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마네현 1905 이전의 모든 지도에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