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외무성의 다케시마 브로셔에 따르면, “…나카이 요자부로는 오키 열도 주민으로 다케시마(독도)에서의 바다 사냥 사업을 안정화하려는 목적을 가졌다…”고 하며, 그 결과 “…일본은 다케시마에 대한 주권 주장 의사를 재확인하였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일본의 주권 주장 전부는 나카이 요자부로의 활동에 근거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 나카이 요자부로)
다음 글은 오쿠하라 헤키운(奧原碧雲)이 쓴 나카이의 전기이다. 나카이 요자부로와 오쿠하라 헤키운은 모두 1906년 울릉도를 방문해 독도가 병합되었다고 선언한 악명 높은 다케시마 조사단에 동행했다. 이 전기에는 나카이 요자부로의 배경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들이 드러나 있다. 또한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독도를 점령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과 동기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나카이는 오키섬 사이고에 거주하던 단순한 물개 사냥꾼에 불과했을까?
메이지 39년(1906년) 오쿠하라 헤키운(奧原碧雲)
표지:「나카이 요사부로의 다케시마 경영 성공 기록」, 메이지 39년(1906년)
오쿠하라 헤키운
「성공 기록」 다케시마 사장 나카이 요사부로의 성공 스토리, 오쿠하라 헤키운(奧原碧雲)
300년 동안 쇄국의 여습(餘習)이 고황에 들어 무릉도원의 오랜 꿈에서 아직 전혀 깨어나지 못하고, 푸른 바다(蒼海)가 주는 이득(遺利)은 허무하게도 외부인이 유린하도록 돌보지 아니하고 불과 연해의 몇 리 해상을 무대로 하여, 함부로 신불(神佛)의 가호를 의지하여 그물(罟網)을 치고 어족이 모여들기를 만일의 요행을 바라듯이 실로 바다사나이의 치욕이 아닐지..이 시기에 광란하는 파도를 질타하여 어족의 근거지로 侵□□□□萬里의 이역으로 원정을 도모하여 혹은 해저천인(海底千仞1)의 深潭□□□□□ 찾고자 하여,
산음(山陰)의 쾌남아란 나카이 요사부로씨와 같은 사람을 그 한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겐지(元治) 원년(1864년) 정월 28일 호키국 도하쿠군(구 구메군)고가모촌 大字 나카가와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로쿠(甚六, 지금은 고인임)라 하고, 어머니는 우라(같은 군 야스다촌(安田) 고모토 규지로(河本久次郞)의 누나)라고 한다. 그는 차남으로 맏형은 기시치로(喜七郞)라 하여 가업을 계승하여 양조업에 종사하였다.
요사부로씨는 메에지 11년(1878년) 시모다소학교(下田小學校)를 졸업하고 나서 마츠에(松江)로 유학하여 큰 유학자(碩儒) 우치다 유우스케(內田友輔)의 문하에 입문하여 수년간 한자를 배우고 메이지 18년(1885년) 말에 봇짐을 짊어지고 동경으로 가서 사문학교(斯文黌)에 들어가게 된다. 오랜만에 산인(山陰) 벽지의 땅에서 성장하여 사회 풍조를 잘 모르던 청년이 한번 활동의 중심인 동경에 들어가게 되니,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자극의 요소가 아닐 수 없고 과연 그의 사상계에 일대 격변을 겪게 되었다. 다년간 심혈을 기울여 학습한 한자는 낡은 인습에 고루하여 앞으로 활발한 사회에 나아가 대활약을 시도하기에는 너무나도 우원(迂遠)하고 너무나도 고지식한 것이어서 적어도 배움으로써 세상에 서기에는 모름지기 영학(英學)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이 늦어져 지금부터 □□□□ 영학을 배우기에는 아깝게도 유능한 시기를 허무하게 보내고 마침내는 남자학(男子學)을 배우게 될 뿐이었다. 수학을 위해 성업(成業)의 기회를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활을 당기고는 돌아오지 않는 청년의 혈기, 속박(羈絆)을 벗어난 사나운 말(悍馬)과 같이 이듬해 메이지 19년(1886년, 23세) 단연학(斷然學)을 그만두고 「사람은 도처에 청산이 있거늘, 뼈를 묻을 곳을 어찌 고향 땅에 한정하리요? (人間到處有靑山, 埋骨何限故鄕地)」라고 소리내어 읊으며 만리 해외의 바다에서 이득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일은 자못 무모한 거사 같은 것이지만 이로써 그가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 그 이래로 여러 가지 모험적인 탐험사업을 기획하거나 혹은 오가사와라섬에 돈벌이를 모색하기도 하고, 혹은 도미를 시도하기도 하다가 마침내 메이지 20년(1888년) 츠쿠바함(筑波艦)에 편승하여 남양탐험을 하고있는 시가 쥬코(志賀重昻) 씨와 호주 시찰을 기획하고 형제의 동의를 받아 수천엔의 여비를 얻어 도항을 준비하던 중 나가사키(長崎)에서 가사센리(笠千里)라는 악한의 손에 걸려 여비 전부를 털리고 여기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허무하게 나가사키의 근방 마츠시마(松島)에 틀어박혀있던 중 러시아령 브라디보스톡에 해삼이 풍부하다는 것을 탐지하였다. 그리하여 잠수기 채취를 기획하고 메이지 21년 친동생인 요시조(嘉造)와 함께 상의하여 조사비, 준비비(運動費)로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가사키의 잠수기 업자가 브라디보스톡의 해삼 채취가 상당히 유망하다는 것을 알고 메이지 23년 경부터 격렬한 □□□□하여, 나카이씨는 약간 스기우라 상점(杉浦商店, 포항에서 가장 큰 일본상점)의 후원을 받은 것만으로 니하시(二橋謙) 무역사무관 이하 재류일본인의 다수를 적으로 삼아 분투하여 항상 우승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결국 니하시 사무관의 취급으로 추첨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또 전승을 차지하게 이르렀으나 잠시 후 니하시씨가 추첨의 결과를 무효로 처리한 결과 그의 사업은 일대 타격을 입게 된다. 동생 가조(嘉造)씨가 상속한 돌아가신 숙부의 유산 전부를 상실하는 불행에 빠지게 된다. 그러는 동안에 러시아국 지방청은 해삼 채취의 유리함과 잠수기 어업의 유해함을 알고 얼마 후에 일본인의 해삼 채취, 잠수기어업을 금지하게 되어 쌍방의 계획은 그림 위의 떡이 되어 버렸다.
메이지 25년(1892년) 그는 브라디보스톡에서 차질의 잔물(殘物)을 거두어 조선 전라도 충청도 방면의 연해를 탐험하고 잠수기를 가지고 방황하지만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용감하고 진취적인 기상이 넘치는 바다의 쾌남아 나카이씨는 차질에 차질이 겹치고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여 지금은 이립(而立, 30세)의 나이가 되었다. 아직 성업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허무하게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메이지 26년(1993년)년으로 그의 가슴 속은 실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귀향 후에는 고향 연해의 해저를 조사하여 반드시 해삼이 서식하고 있음을 확신하여 자신의 친구의 □□□□ 열성적인 충고를 물리치고 단연코 큐슈지방에서 어부를 투입하여 시험한 결과 좋은 성적을 얻었다. 마침내 자금을 투입하여 메이지 27~28년부터 30년 경에 걸쳐 하쿠슈(伯州, 伯耆國=지금의 돗토리현 서부지역) 오키야(御來屋)를 본거지로 하여 오키, 이와미 연해에 걸쳐 해삼채취 잠수기어업을 영위하였다. 사업을 크게 확장하여 당시의 나가사키상보(長崎商報)라는 이름으로 하쿠슈산 해삼이라는 명목으로 기업 상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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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1년 시마네현청과 돗토리현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건착망(巾着網) 시험사업을 인수하였으나 어떤 사정으로 인하여 한때 잠수기 어업을 중지하였다. 번성하게 어업을 경영하였으나 여러 가지 분란 때문에 마침내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는 사원의 배척을 당해 결국은 잠수기 어업에 의해 마련된 약간의 자금을 탕진하게 된다. 게다가 세간의 신용을 잃어버리고 그 이후 차질에 차질이 겹쳐 상당한 부채를 얻어 상당히 곤란한 지경에 빠졌다.
한고비 한고비를 넘길 때마다 마음은 더욱 확고하여 용감하게 나아가 바다의 이득에 주목하게 되어 그는 서너 차례의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뜻을 굽히지 않고 거주지를 오키섬 사이고(西鄕)로 옮기고 (현재의 거주지) 천신마고 끝에 새 사업의 기획에 분주하던 중 잠수기 어업자로부터 리양코섬에 강치가 군집해 있다는 것을 듣는다. 그는 왕성한 사업을 바다에서 기획한 것은 다시금 강치어업을 향해 힘쓰게 되었다.
리양코섬이란 리앙코르섬이 전화된 것으로 250년 이전부터 오키의 어부에게 발견되어 그 이후 마츠시마(松島)라는 명칭으로 연해지방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나 해군 수로부의 조사에 의해 울릉도가 일명 마츠시마라고 된 이래로 리앙코르암으로 불리는 절해의 바위섬이다. 북위 37도 9분 30초, 동경 131도 55분 0초에 위치하여 오키섬의 서북 85해리, 울릉도의 동남 55해리, 일본해의 중심에 있는 바위섬으로써 동서의 2개의 바위섬 및 몇 십 개의 작은 암초로 구성된다. 서도는 해발 381척(尺), 주위 10정(町) 남짓, 전도가 화성암(火成巖)으로 되어 있으며 반□ 이상은 약간의 경토가 덥혀있다. 잡초가 자라고 있을 뿐 한그루의 수목도 없으며 연안은 단애절벽을 이루어 두 섬이 마주보는 곳으로 동도에 협소한 몽돌지대가 있어 임시로 거처하는 움막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이다. 섬 전체에는 음료수는 없고 작물도 없으며 에로부터 무인의 바위섬이었다. 메이지 38년(1905년) 2월 다케시마로 명명하고 시마네현 영토로 편입하여 같은 해 5월 28일 일본해전에서 도고(東鄕) 제독의 공보에 의해 다케시마라는 이름은 전세계에 선전하기에 이른다.
패군의 장병은 말이 없다고 하기를 수년, 만강(滿腔)의 기업열은 너무나 왕성하여 금할 수 없었다. 메이지 36년(1904년) 그는 다시 리양코섬 강치 포획업을 기도하게 된다. 그러나 친구나 지인 모두가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특히 마노 데츠타로(眞野哲太郞)씨처럼 매우 불가한 일이라고 경고하였다. 오키국 도젠으로부터 앞은 어업에 종사하고자 하여 실패한 경험(歷史)를 들면서 열심히 충고하는데도 불구하고 나카이씨의 결심은 확고부동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메이지 36년 5월 의기투합하는 오바라(小原), 시마야 겐죠(島谷權臧) 두 사람을 데리고 리양코섬에 도항하게 된다. 두 사람은 건장한 건아 8명과 함께 너비 8척(尺), 길이 4간(間) 어선을 타고 북해의 큰 파도를 헤치고 동 섬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일장기를 바윗머리(巖頭)에 펄럭이게 하고 시마야(島谷)씨는 유망하다는 보고를 만들어 먼저 귀항하였다.
그러나 총기 화약 기타 어렵도구의 준비가 불완전하여 같은 해 충분한 성공을 보지 못하고 귀국하였다. 이듬해의 어기(漁期)를 기다려 일대웅비를 시도하고자 계획하여 실로 리양코섬은 일본해 중에서 강치의 군집지로 하여 매년 5월경부터 7~8월경에 이르는 시기에 수천만의 강치가 분만 교미를 위해 동 섬에 군집하여 바윗머리는 강치군락으로 뒤덮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는 마음속에 이듬해의 성공을 기하면서 비밀리에 준비에 착수하는데 심복인 건아 오바라씨는 예비소집에 응하여 출정의 길에 올랐다. 시마야씨는 병마가 덮쳐서 사업상 크게 좌절을 겪기도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몸소 수명의 어부들을 인솔하여 섬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동 사업이 유망하다는 것을 탐지하게 되자 이시바시 마츠타로(石橋松太郞), 이구치 류타(井口龍太), 가토 시게죠(加藤重藏) 등 유력한 경쟁자가 나타나 경쟁남획이라는 폐단이 생겨났다. 강치어업은 몇 년을 가지 않아 절멸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어렵구역 대여, 제한포획의 필요성을 느꼈다.
참고로 해도(海圖)에 의하면 동 섬은 조선의 영역(版圖)에 속하는 것으로써 일단 외국인의 내습을 만나더라도 보호를 받을 길이 없으며 이러한 사업에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동 섬 대여를 조선정부에 청원하여 독점으로 어렵권을 점유하고자 결심하였다. 같은 해 어기가 끝나고 나서 일확만금의 꿈을 품고 상경의 길에 오른다.
그는 우선 오키 출신인 농상무성 수산국 직원인 후지타 간타로(藤田勘太郞)와 상의하고 마키(牧) 수산국장을 면회하여 도움을 청한 바 동 섬의 소속은 확실한 징증(徵證)이 없으며 특히 일한 양국에서의 거리를 측정해 보면 일본 쪽으로 10해리 더 가깝다. (이즈모국 다코바나(多古鼻)에서 108해리, 조선국 릿도네루곶(호미곶?)에서 118해리) 덧붙여서 조선인으로써 종래에 이 섬 경영에 관한 흔적이 없는 것에 비해 일본인이 이미 이 섬 경영에 종사한 적이 있는 이상 당연히 일본령토로 편입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용기를 내어 마침내 결심을 하고 리양코섬 영토편입 및 대여원을 내무 외무 농상무의 3대신에게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내무성 지방국에 출두하여 진술한 바 있었으나 동 국에서는 현재 러일전쟁 중이므로 외교상 영토편입은 시기가 아니며 원서는 지방청으로 각하(却下)해야 한다는 취지를 통보받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재차 이것을 마키(牧) 수산국장이 주선하는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외교상의 문제가 있다면 어찌할 수 없다는 말에 실망낙담 하여 허무하게 불우함을 푸념할 뿐이었다. 마침 때는 지방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하라(井原) 시마네현 지사는 농상무성 주임인 현속(縣屬) 후지타 유키토시(藤田行年)씨를 따라 상경 중이었는데 나카이씨의 활로를 여기서 구하기 위해 후지타를 여관에 찾아가 이를 상의하였다. 그는 크게 찬성하여 지방국에 자세히 보고할 필요가 있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도 지방국의 의견진술과 같이 후지타씨도 도저히 성공의 전망이 없다고 하여 귀향하여 시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하였다.
바야흐로 장래 유망한 사업을 눈앞에 두고 소속이 명확하지 않아 빤히 보면서 경영의 시기를 놓친다. 게다가 남획이 수년에 걸쳐 이루어져 동업의 앞날이 매우 걱정스럽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카이씨의 마음속을 실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아가 한번 결심을 하면 백 가지 고난을 이겨낼 결심이 되어야 한다고 동향 출신의 구와타 구마죠(桑田熊藏) 씨(현재 귀족원 다액납세자임)에게 이를 상의한다. 구와타 박사는 즉시 서면를 적어서 그를 야마자(山座) 정무국장에게 소새한다. 나카이씨는 야마자 국장을 면회하여 리양코섬 경영에 대하여 의견을 진술하고 열성이 넘치지만 여전히 결정된 사항이 있는 듯하였다. 국장은 흥미있게 들은 후 외교상의 일은 다른 사람이 관여할 바가 아니며 조그만 바위섬 편입과 같이 사사로운 소사건일 뿐이다. 지세 상으로 보거나 역사 상으로 보거나 또는 시국적으로 보아 현재 영토편입은 대단히 이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을 꺼내기도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구와타씨도 동행하여 내무성에 가거나 이노우에 서시관을 면회하여 사정을 진술하고 마침내 동성의 동의를 얻어 각의에 올려져 메이지 38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로써 동현의 영토로 편입하고 다케시마(竹島)라고 명명하였다.
나카이씨는 일단 귀향하여 서서히 계획을 준비하였는데 드디어 영토편입의 건이 발표되자 어렵지 대여에 대하여 시마네현의 소관으로 되었다. 경쟁자가 속출하여 전기의 수명 이외에 많은 출원자가 나타나 시마네 현청에서도 그 채택이 곤란하였다. 나카이씨는 하시오카 도모지로(), 이구치 류타(), 가토시게죠() 등 세 사람과 협동하여 다케시마어렵 합자회사를 조직하였고 동 섬 강치어렵를 출원하고 같은 해 6월 5일 마츠나가(松永) 시마네현 지사로부터 허가를 얻어 동 섬의 강치어렵권은 나카이씨 외 3명의 점유로 돌아왔다. 새끼를 보호하고 포획두수를 제한하여 장래계획을 세우고 해상에서의 다년간의 경험과 강치포획에 관한 수년간의 실험에 의해 올해부터 동 섬 경영을 향해 전력을 경주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해국(海國)의 대장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부기: 이번 봄 다케시마 시찰단의 일행으로 하룻저녁을 나카이씨와 회담하여 고심참담한 그의 경영담을 듣고 흥미를 금할 길 없었다.
오키마루(隱岐丸) 갑판 위에서 손을 잡고 그 성공을 비던 때를 생각하며 돌아와 본편을 적는다.
메이지 39년 5월 20일
시가 시게타카는 찰스 다윈을 숭배했다. 따라서 그는 다윈의 HMS 비글호처럼 항해했다. 1885년 일본 군함 쓰쿠바호(筑波艦)에 승선한 시가는 영국의 한국 고문도 점령을 목격했으며, 이는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일본 해군의 허가를 받아 시가는 1887년 다시 쓰쿠바호에 승선해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를 항해했다.
(‘The Imperial Japanese Navy and the Constructed Consciousness of a South Seas Destiny’)
“…매년 진무 천황 즉위 기념일인 2월 11일과 서거 기념일인 4월 3일… 비록 작은 규모일지라도 일본 제국의 영토를 의례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 날마다 우리 해군 함선들은 아직 소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섬으로 항해하여 점령하고 일본 국기를 게양해야 한다… 이러한 계획은 해군에게 실질적인 경험으로서 직접적인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사기가 저하된 일본 민족에게 원정 정신을 고취시킬 것이다…”
이 짧은 발췌문에서 눈에 띄는 다른 점들이 있다. 일본 정부는 해군을 통해 제국 확장을 위한 탐사, 어업, 정착을 장려했으며 민간인의 항해를 종종 허용했다.
또한 주목할 점은, 메이지 20년(1887년) 나카이 요자부로가 실패한 모험을 위해 수천 엔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따지면 상당한 금액이다! 과연 나카이 요자부로는 평범한 물개 사냥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나가사키에 있던 그의 잠수 회사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삼 채취가 상당히 유망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메이지 23년(1892년) 경부터 이 사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메이지 25년(1892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착한 잔여 인원을 모아 조선(한국) 전라도와 충청도 연안을 탐사하며 잠수 장비를 가지고 돌아다녔으나, 큰 수확은 없었다…”
“…마침내 자금을 투자하여 메이지 27~28년(1894~1895년)부터 30년경까지 오키야(御來屋, 현 돗토리현 서부 하쿠슈(伯州, 伯耆國) 지역)를 거점으로 오키(隠岐)와 이와미(岩見) 해안을 탐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주저 없이 거처를 오키섬(現 거주지) 사이고(西鄕)로 옮겼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어릴 적부터 먼 곳으로 항해하여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카이는 주머니에 금화 만 닢을 넣고 도쿄로 떠났다…” 많은 일본인들처럼 그는 오가사와라 제도(小笠原諸島)에서 이익을 얻고자 했으며, 심지어 미국이나 호주에서도 기회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계속해서 고향으로 밀려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의 충청도와 전라도, 하쿠슈(博州)를 거쳐 사이고(西郷), 오키(隠岐) 섬에 이르기까지 나카이 요자부로는 말 그대로 수천 킬로미터를 항해했다. (오른쪽 지도 클릭)
결국 나카이의 꿈은 다른 일본인 불량배들과 함께 한국의 울릉도에 불법 침입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부산에서 어획량을 신고하고 세금을 내지 않는 한 한국 해역에서 어업은 불법이었다. 울릉도로 가는 길에 벌인 불법 활동으로 나카이는 독도를 알게 되었다. 이후 나카이는 수익을 위해 쿠릴 열도까지도 진출했다. (아래 지도 참조) 그러나 1914년 1월, 북부 쿠릴 열도에서의 바다사자와 물개 사냥이 금지되었다..
“…이후로 쿠와타 쿠마조도 그를 따라 내무성으로 동행하거나 사정을 설명하러 다녔다. 마침내 같은 부처의 동의를 얻어 메이지 38년(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공고 제40호로 리양코(독도)를 편입하여 다케시마(竹島)로 명명하였다…”
나카이의 운명은 구와타 쿠마조라는 지인을 통해 호전되기 시작했다. 나카이와 구와타는 같은 고향(돗토리 지방) 출신에 또래였다. 쿠와타는 1893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고학력이었으며 유럽에서 사회 문제도 연구했다. 쿠와타는 일본 정계의 떠오르는 신성이었는데, 실제로 1904년 9월 고액 납세자로서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정치에 정통했던 가와타 구마조는 나카이를 정치계로 이끌었다. 먼저 나카이를 내무국장에게 소개한 뒤 내무대신 본인에게도 소개했다. 이는 중요한 계기였는데, 1877년 같은 부처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라고 판정한 데도 불구하고 결국 독도(다케시마)를 ‘편입’한 부처가 바로 내무성(內務省)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고문록 문서
카와타 쿠마조는 또한 나카이를 정치국장 야마자 엔지로에게 소개했다.
이 일기의 한 문장이 독도를 ‘편입’한 일본의 진실을 드러낸다. 야마자 엔지로가 “…현 상황…” 때문에 섬(독도)을 편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진술했다. 그 “현 상황”이란 무엇이었을까?
이때 울릉도와 독도 주변 해역에서 일러 해전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야마자 엔지로와의 대화에 대해 ‘中井養三郎 「事業経営概要」’(나카이 요자부로, 사업 경영 개요)라는 제목의 또 다른 인터뷰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아래는 시마네현 웹사이트에 게재된 야마자 엔지로의 정확한 인용문이다.
“…그 결과, 나는 즉시 외무성으로 가서 당시 정치국 국장이었던 야마자 엔지로 씨에게 조언을 구했다. 당시 외무성 정무국장이었던 야마자 엔지로 씨는 논의에 깊이 관여하셨으며, 당시 상황(러일전쟁)으로 인해 해당 섬을 일본 영토로 편입하는 것이 시급한 필요 사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적군 함선을 감시하기 위해 망루, 무선국, 해저 전신선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야마자 엔지로란 누구였는가?
후쿠오카 출신의 외교관으로, 구로다 가문의 아시가루(최하위 무사)의 아들이었다. 1892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외무성에 입성하여 부산, 상하이, 인천, 런던, 한국에서 주재관으로 근무했다. 1901년 정치국장으로 승진했다.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 아래에서 영일동맹 체결, 러일전쟁 관련 러시아와의 교섭 및 외교에 관여했다. 포츠머스 평화회의에 참관단 일원으로 참석하여 고무라 외교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야마자 엔지로 국장은 민족주의적 우익 단체인 건양사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건양사는 테러 조직으로, 불만을 품은 전직 사무라이를 모집했으며 조직 범죄에 연루된 인물들도 끌어모아 외국인 및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폭력 및 암살 작전을 수행했다.
나카이의 일기에서 지적했듯이 내무성은 독도 병합에 반대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1877년 이후 울릉도와 독도 모두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내무성은 갑작스럽게 입장을 바꿨다. 우측 사진은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이다.
내무성이 입장을 완전히 바꾼 이유는 무엇인가?
나카이 요자부로의 1910년 개인 일기(시마네현 다케시마 자료)에서 발췌한 추가 내용들은 내무성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화 배경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저는 내무성, 외무성, 농상성 세 부처를 통해 이 섬을 일본 영토로 편입하고 저에게 임대해 줄 것을 신청했습니다.
내무성 당국은 이 시점(러일전쟁)에 한국 영토로 의심되는 황무 섬을 획득하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려는 야심이 있다는 여러 외국들의 의혹을 증폭시킬 수 있어 상황이 심각해질 것이며 이익은 극히 적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결국 제 청원은 기각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굴하지 않고 외무성으로 달려가 당시 정무국장 야마자 엔지로와 상세히 논의했습니다. 특히 외교적 측면에서 그는 내무성 의견을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기운차게 내무성에 이 신청서를 신속히 외무성에 회부하도록 촉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케시마(독도)는 우리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겉보기에는 외무성의 고모라 주타로가 다케시마 편입을 강력히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고모라 주타로(와 기모츠키 가네유키)가 독도 병합을 서둘러야 했던 특별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물개 사냥과는 무관했다.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가 다케시마 주변 해역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는 포르트아르투르가 일본에 함락된 직후였다. 이 링크 참조 발트 함대는 3월에 다케시마를 지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오른쪽 이미지 클릭)“..그는 먼저 오키 출신 농상성 수산국 직원인 후지타 간타로(藤田勘太郞)에게 접근했다. 수산국 국장 마키 마코토(牧 朴真)를 만나 그에게 진술을 했다…”
나카이가 시마네·돗토리 양현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해는 우연이 아니다. 1898년은 일본 심해어업 진흥법이 시행된 해와 동일하다. 또한 놀랍지 않게도, 앞서 언급된 농림수산국장 마키 마코토(牧 朴真)는 1899년 6월부터 한 달간 한국 연안 지역을 시찰할 예정이었다.
그곳에서 일본 각 현은 어업 협동조합을 구성해 한국 연안 해역으로 몰려들었다.
마키 마코토(牧 朴真)의 배경
히젠국 미나미타카라이군 시마바라무라 신켄(현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에서 시마바라 번의 무사 마키 신세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키는 일본 육군성에서 근무하는 등 오랜 정치 경력을 쌓았다.
1898년 11월, 마키는 농상성 수산국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농무국장도 역임했다. 이후 대일본수산협회 회장, 일본통조림협회 회장, 대일본어업공업협회 회장, 대일본수산협회 부회장을 지내며 어업 진흥에 헌신했다.
마키가 일본 군부와 제국 일본 어업계에서 쌓은 경력을 고려하면, 일본 영해 확장을 위해 독도(다케시마) 병합을 지지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모츠키 가네유키(肝付兼行)는 수로국 국장이자 오사카 시장으로, 1853년 가고시마(鹿児島)에서 태어났다. ‘수로국’이라는 명칭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초기 수로국은 일본 해군 산하 기관이었다. 이후 수로국은 독립 기관이 되었으나, 일본 해군에 중요한 전략적·물류적 지원을 제공하는 군사 부서로 남았다.
기모츠키 가네유키는 일본 연안의 해상 측량에 전념했다. 제국 해군 기지 선정과 관련해, 기모츠키 중령이 이끄는 측량팀은 1883년 구레(呉)와 사세보(佐世保)에서 수로 측량을 수행했다. 해군측량국장으로서 그는 상업 항구와 군항 모두의 위치를 결정할 권한을 가졌다. 기모츠키 가네유키는 군사 및 상업 항구 위치 선정에 관한 1차 정보를 보유한 권위자로 인정받았다.
측량, 전략 및 군사 지식 분야에서 기모츠키가 수행한 광범위한 역할을 고려할 때, 그를 일본 근대 해군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결국 기모츠키는 오늘날까지 사용 중인 일본 최대 규모의 두 해군 기지 위치 선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앨프리드 테이어 매헌은 미국 해군 장교이자 역사가로, 종종 19세기 미국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받는다.매헌은 국가의 위대함이 평화 시에는 상업적 이용, 전쟁 시에는 통제라는 측면에서 바다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었으며,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역사를 풍부한 사례의 보고로 활용했다. 그는 해군 장교 교육이 엄격한 역사 연구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한의 전략적 틀은 함대의 전투력 수준뿐만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를 강조했다.
마한의 저서 『해군력이 역사에 미친 영향』은 특히 일본에서 즉각적인 인정을 받았다. 이 책은 1896년 일본어로 번역되었으며, 해군 장교들의 전문 단체인 수교사(水協社)가 번역을 후원하고 배포했으며, 일본 제국 해군(IJN)에서 교재로 사용되었다. 마한 자신이 언급했듯이, 그의 저작은 다른 어떤 언어보다 일본어로 더 많이 번역되었다. 이러한 활용은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 해군 확장을 저지하려는 일본 해군의 계획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결국 1904-05년 러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모츠키는 대부분의 일본 해군 고위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알프레드 테이어 매헌의 ‘해군력’ 이론을 열렬히 지지했다. 기모츠키의 독창성은 매헌의 해군력 이론을 해군 전략뿐만 아니라 연설 같은 홍보 영역에도 적용한 데 있었다. 기모츠키는 또한 마한의 해군력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해상권 이론이라는 해양 제국주의 이념을 일본 전역에서 강연했다. 그는 일본의 발전을 해상 지배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해양 제국주의 정책을 선호했다. 기모츠키는 마한의 논리를 통해 일본 제국이 영국이 지중해를 지배한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일본을 둘러싼 바다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모츠키 가네유키의 인용문:
“…동양의 지중해란 무엇인가? 동해, 황해, 그리고 일본해가 바로 동양의 지중해이다. 지중해에서 가장 중요한 세 해역을 점유한 일본 제국은 그 지배권으로 동양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즉, 기모츠키는 알프레드 시어리 메이헌의 해군력 이론을 적용하여 러일전쟁에 대비한 전략을 수립했다. 동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전략가로서의 역량을 갖춘 기모츠키가 독도를 군사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1월 13일 일본 군함 쓰시마호에 발송된 비밀 지시문 제276호에는 독도 측량에 대한 명시적 지시가 담겨 있었다. 해군 수로부(水路部)가 독도를 측량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지도에 따르면 일본 해군 수로부는 적어도 1876년부터 독도의 위치와 형태를 측량해 왔습니다. 이번 측량은 군사 감시탑과 통신선 건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의료관도 파견되어 독도 해수를 분석했습니다. 명백히 이 측량은 순수히 군사적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모츠키호가 이 과정에 관여했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요..?”
1905년 1월 5일, 군함 쓰시마호의 사에도 다케타에루 함장이 해군 감시탑 및 전신소 건설을 위한 측량 결과를 완성하였다. 이 보고서는 바로 수로부장 기모츠키 가네유키에게 제출되었다. 특히 사에도 다케타에루의 측량 보고서에는 독도 내 잠재적 건설 부지, 수자원, 그리고 각 관측 지점별 가시거리 범위를 표시한 지도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The Logbooks of the IJN Warship Tsushima
중요한 점은 위 군사 행동들이 일본이 독도 섬을 병합하기 몇 달 전에 수행되었다는 사실로, 군사적 의도가 독도 병합을 추진한 일본의 동기였음을 보여준다.
Dokdo and the Telegram by Japan’s Warship Izumi – 和泉艦
나카이는 부자가 되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불법으로까지 한국 영토에 침입한 떠돌이 잠수부였다. 나카이 요자부로는 한국의 전라도와 충천도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는 불법이었다. 어부들은 부산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통해 어획량을 신고하고 세금을 납부하며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불법 어민들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나카이는 평범한 어부가 아니었다. 그는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보조금)까지 받았다. 이는 그가 한국 영해로 불법 침입하는 데 자금을 조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일본 수산청 역시 나카이와 다른 어민들이 한국 해역으로 대거 몰려드는 것을 지원했다.
나카이는 지역 지인들을 통해 정치적 지도를 받았다. 고향 친구가 나카이 요자부로를 다른 유력 정치인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쿠와타 쿠마조부터 야마자 엔지로, 고무라 주타로, 그리고 수로국장 기모츠키에 이르기까지. 내무성은 독도(다케시마) 병합을 반대했으나, 외무성은 일본 해군 고위층의 지원을 받아 나카이의 신청을 강행 처리했다.
일본의 독도 편입은 군사적 목적이었습니다. 기록과 지도에 따르면 일본은 오랫동안 독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기록에서 일본은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제외하거나 한국 영토로 간주해 왔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의 울산해전 직후까지 독도(리앙쿠르 바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일본 국가전쟁기록보관소의 군사 기록에 따르면 1904년 9월부터 독도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증가했는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일본이 독도를 오키섬 출신 물개 사냥꾼을 대신해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나카이 요자부로의 일기 자체가 이를 반증한다. 역사적 맥락과 관련 1차 사료들을 종합해 볼 때, 일본의 독도 병합 동기는 오히려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야망에 더 근접해 보인다. 일본은 마침내 1905년 독도(다케시마) 병합이 탐욕과 폭력의 행위였음을 인정하고 독도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조치는 한일 관계에 있어 큰 진전이 될 것이다.
일본 해군 공보관 기모츠키 가네유키 – 시바사키 리키에이
기모츠키 가네유키(肝付兼行)에 대한 고찰 – 김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