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의 독도

독도와 20세기 초 일본의 영토인식
1900년대 초 일본의 기록에서는 독도가 한국의 강원도 일부로 표시되었다.
다음 이미지들은 한국의 울릉도와 이웃섬인 리앙쿠르(독도)와 관련된 여러가지 문서들이다. 이 목적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거주”하였고 독도에도 어업을 하였다는 일본인들의 영토인식을 결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은 이들 섬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들은 그 섬들을 일본 땅이라고 생각했던가?

정치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본은 독도가 일본 영토이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여기서 볼 수 있는 많은 역사적인 지도에 나타난다. 지도1, 지도2, 지도3, 지도4. 우리는 또한 일본의 최고위층이 울릉도와 기타 섬이 시마네현의 일부가 아니라고 결론지은 사실을 이 문서를 통해 알고 있다.(링크) 이 페이지는 정치적인 관점을 다루기 보다는, 이 지역에 관하여 지식이 많은 일본사람들의 관점을 취급하고자 한다. 이 문서들을 통하여, 우리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활동이 일본의 역사적인 독도에 대한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유효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위 왼쪽 : 전체지역 지도는 한국, 동해, 그리고 일본의 서쪽 해안의 오키 섬을 검은 색 상자로 표시하여 나타내고 있다. 위 오른쪽: 20세기 초, 일본의 불법 도해자들과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활동하는 내용의 지도
이 지역에 대한 기본적인 지리적 연구에서는 일본어부들이 한국의 울릉도와 독도가 제공하는 풍부한 해양자원을 가져가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독도의 위치가 너무 멀어서, 일본본토로부터 독도로 어업활동을 하러 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힘들다. 가장 가까운 일본 땅에서부터 이곳으로 어업을 하는 것은 왕복 300kms 이상을 여행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초는 아직 증기선과 범선들이 다니던 때였고, 역사적 기록은 이들 일본 어업선박들이 매우 현대화되었다고 한다. 20세기 문서들은 독도에 신선한 음료수가 부족하기 때문에 섬에 접근하기가 어렵고, 머무는 기간이 한정될 수 밖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이 지역으로 항해한 어부들이 이 지역을 일본 땅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어렵게 만들거나, 울릉도에 부속된 땅이라고 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1901년판 일본 흑룡회 발간 어업지침서
1901년 발간된 일본의 흑룡어업지침. 1901년 시마네현에 기지를 둔 어업 기구 흑룡회는 韓海通漁指針, 또는 조선해양 어업 지침서를 발간하였다. 흑룡회는 초국가주의자들의 기구로 그 모습은 일본의 팽창주의 시대에 극우주의자들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모임이다. 이 간행물은 1901년 3월에 발간되었다.

위의 사진들은 흑룡어업지침서의 표지이다. 날짜가 메이지 34년(1901년) 3월 6일로 되었다. 더 큰 사진을 보시려면 클릭하시오.
1901년 그리고 1903년에 발간된 흑룡회의 지침서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Yankodo(독도) 내용을 담고 있다. 페이지 90에서는 한국의 강원도를 설명하면서 시작된다. 같은 장의 93페이지 뒤에서, 독도를 기술하는 부분이 있다. 독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정보를 잘 제공하는 이 내용은 “한국인들 그리고 일본의 어부들은 이 섬을 Yangkodo라고 부른다…”는 것이었다.

이 어업 지침서는 1901년 3월 당시 어업시즌에 대비하여 발간된 것이다. 따라서 독도관련 자료는 그 전년도(1900년)에 수집된 것이다. 이 짧은 문구는 일본이 소위 “주인 없는 땅”이라고 하여, 독도를 편입하기 5년 전부터 한국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또한, 그것은 울릉도에 있는 한국인들이 1900년 10월 당시 공포된 칙령 41호를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링크를 보시오)

1901년 판 일본의 흑룡회 지침서 목록은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을 처음부터 한국 영토에서 강원도로 포함시키고 있다. 그것 역시 일본의 독도 편입 5년 전에 한국인들은 독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확정한다.
1903년판 일본의 흑룡회 어업 지침서

위 이미지들은 흑룡회라고 부르는 일본 극우파들이 집단에서 발간한 책의 이미지이다. 위의 두 번째 페이지에서, 독도는 강원도(한국)에 목록이 되어 있고, 울릉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다. 나아가 이 지침서는 문서 흑룡회의 조선 어업 지침서라고 제목을 붙였다.
1903년 일본의 흑룡회 어업 지침서 번역.
두 번째 페이지 위에는 흑룡회 조선 어업 지침서의 색인이다(이미지 클릭). 저자가 붉은 색으로 표시한 분서는 한국의 강원도이며 그리고 아래에는 “Yangkodo” 또는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이 보인다. 이것은 이 지역에 출몰하던 일본어부들이 독도를 모두 한국(강원도)의 일부라고 생각하였으며, 울릉도에 부속된 섬이라고 생각하였음을 보여준다. 확실히, 만약 당시 일본의 어부들이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을 일본의 일부로 생각했다면, 그 섬은 한국 어업 지침서 강원도 목록에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고, 한국의 울릉도에 속한 것으로 표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해당하는 적절한 문구는 다음과 같다:

“…약 30-리 울릉도 동남쪽, 그리고 일본의 오키 주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같은 위치에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다. 날씨가 맑으면 山峯(성인봉)에서 그 섬을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 어부들은 그것을 “Yanko”라고 부르며, 길이는 약 10-cho이다. 해안은 굴곡이 심하고 복잡하여 배들이 정박할 수 있고 바람과 파도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화목을 구하거나 음료수를 구하기가 어렵고, 땅을 몇 몇 shaku (1.0 – 1.5미터) 깊이 파도 물을 발견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많은 강치가 살고 있으며 섬 주변에는 많은 전복이 있으며, 해삼, 우무가사리 등이 많다. 몇 년 전. 잠수장비를 갖춘 배가 야마구치(山口)현에서 어업을 나갔지만, 그들은 많은 강치들이 물로 뛰어드는 때문에 어업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고, 먹을 물이 부족해서 항구로 되돌아 와야만 했다. 그것은 5월 또는 6월이 강치들의 번식기였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이타(大分)현에서 몇 년 전부터 5월 또는 6월에 상어잡이를 나갔는데, 상어잡이 어구를 설치할 좋은 곳이 거기에 있었다. 우리는 지난 봄에 거기서 돌아온 어부들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충분히 좋은 곳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거기에 다만 두 세 번 갔지만, 매년 몇 마리만 잡는다고 하였다. 그가 당시 말한 것은 그의 직업적인 관점에서 말한 것이고, 상어와 고기가 어떻게 사는지를 알고 있으며, 이것으로 보아 그 지역은 어업의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장래에 어업기지로서 가능성이 있다. 이 섬은 업무에 참고할 가치가 있다. …”

위의 사진들은 한국의 울릉도에서 찍은 독도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일본역사가들이 독도는 한국영토에서 가시적인 거리에 있지 않다는 주장을 뒤집는 증거이다. 수 많은 기록에서 한국의 울릉도에서 독도의 가시성은 알려지고 있으며, 6세기 이후 논쟁할 것도 없이 한국땅이다.(더 큰 사진을 보시려면 클릭하시오)
위 문서는 몇 가지 사실들을 확정한다. 첫째 일본의 다케시마 로비스트들은 흔히 울릉도에서 독도는 가시적이라는 한국 주장을 의심하여 왔다. 그러나, 1903 흑룡회의 조선어업지침서는 역사적으로 독도는 사실상 울릉도 산 정상에서 볼 수 있다는 가시성을 증명하였다.

한국의 독도 인지는 역시 흑룡회의 조선어업지침서에서 증명되었다. 그것은 명확하게 한국과 일본 어부들이 이 섬을 Yangko(Liancourt의 방언)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이 일본문서는 1905년 일본의 독도 편입 3년 전에 한국이 이 섬을 인식하였음을 보여준다.

독도의 음료수 부족도 여기서 언급되었다. 이것은 일본 본토에서 먼 곳 까지 모험을 하며 어업을 하는 것이 어려움을 보여주었고, 오랫동안 독도에 머물지 못하게 하였다.

1904년 한국에서 일본의 업무지침서

위: 한국에 관한 이 책의 이미지들은 어떻게 일본이 한국의 강원도(江原道)의 일부로서 독도를 기술하고 있는지를 나타낸다. 이 책은 또한 독도가 울릉도(鬱陵島)의 부속된 섬으로 설명하고 있다.
1904년 이 지침서는 일본의 어부들이 한국에서 일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발간한 책이다. 이 책의 내용에는 강원도에서 어업을 하는 업무부분이 있다.

이 책은 독도(Liancourt-Yankodo)를 일본의 흑룡회 어업지침서에서 울릉도와 독도 목록에서 다루고 있다. 중앙 페이지 위에는 울릉도(鬱陵島)와 함께 강원도(江原道)를 다음 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 다음 페이지에서부터 그리고 다음 장에서는 “Yangkodo-ヤンコ島” (독도)를 간단히 다루고 있으며, 다음 장은 한국의 본토 강원도의 죽변을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지침서는 독도를 한국영토로서 다시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페이지 자체에서 독도는 “한국 업무 지침서”로 문서화되어 있다.

아래는 관련된 문귀 번역이다:

“…Yankodo(독도) 일본 오키섬과 울릉도의 중간에 있으며 30리의 거리에 있다. 혹시, 계류장이 해변에 설치될 수 있겠지만, 화목을 구하기 어렵고, 음료수도 구하기 어렵다. 전복, 해삼, 우무가사리 등을 수확할 수 있다. 비록 많은 상어들이 수역에 살고 있지만, 강치들이 이 지역에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상어를 잡기가 어렵다…”

울릉도 상황에 관한 1902년 일본의 보고서
1902년 일본문서 제목, “외무성, 통상국, 문서 부: 교역 문서들” (外務省通商局編纂 通商彙纂)가 발간되었다. 부속문서에는, “한국의 울릉도 상황”이라고 제목이 적혀있고, 그리고 울릉도의 지리, 기후, 인구, 생산품, 상업, 어업, 운송, 정박, 그리고 풍토병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울릉도의 상황에 대한 진실된 내용을 밝혀주며, 그리고 한국의 문제로서 일본 도해자들의 몇 가지 문제들도 있다. 또한, 거기에는 울릉도 지역으로 수백 km를 항해하여 온 전라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는 또한 독도(Yangkodo) 어업부분에 관한 간단한 내용도 있다.

1902년 일본의 한국의 울릉도 섬에 관한 보고서 번역
2부 – 섬에 사는 한국 거주자들의 상황
“…고대로부터 이 섬에 살아온 한국인들은 없다. 21년 전 4명의 사람들이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이주하여 왔는데: 배계주 (裵季周)、김대목(金大木)、변경운(卞敬云)、그리고 전상일(田士日)이었다. 그들은 산과 토지사이에 개간을 하고, 농지를 만들었다. 다음해 황종해(黃鐘海)、최도수(崔島守)、전사운(田士雲)、김화조(金花椒)、홍봉요(洪奉堯)、그리고 이손팔(李孫八) 등이 강원도 강릉지방(江原道江陵地方)에서 왔고, 장경이(張敬伊) 등의 약간의 사람들이 전라도(全羅道)로부터 왔다. 모두 7명의 사람들이 섬에 왔다. 그 후 매년 많은 사람들이 4방에서 왔는데, 강원도, 서울, 함경도(咸鏡), 전라도(全羅)에서 왔다. 그들의 집은 흩어져 살았으며, 그리고 그들은 농업에만 전념하여 땅을 개간하였다.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남동쪽 부분 섬은 검고 조선 땅보다 비옥하다. 그러나, 북서쪽은 척박한 땅이며 그리고 농사가 어렵다…”
1902년 울릉도의 한국인과 일본인의 위치
위 1902년 간행물은 한국인들과 일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국인의 거주지와 울릉도를 방문한 일본인들의 위치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래에는 각 마을에 사는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숫자를 나타내기 때문이며, 일본의 역사적 울릉도 지도를 나타내 주기 때문이다. 더 큰 지도를 보려면 클릭하시오.
도동 (道洞) – 27명 한국인; 36명 일본인
복동 (伏洞) – 10명 한국인; 2명 일본인
중령 (中嶺) – 30명 한국인; 2명 일본인
통구미 (通龜尾) – 20명 한국인; 5명 일본인
굴암 (窟巖) – 7명 한국인
산막곡 (山幕谷) – 26명 한국인
햐옥동 (香木洞) – 1명7 한국인
신촌 (新村) – 35명 한국인; 1명 일본인
추산 (錐山) – 7명 한국인; 1명 일본인
천년포 (千年浦) – 6명 한국인
천부동 (天府洞) – 16명 한국인
정석동 (亭石洞) – 20명 한국인
내수전 (乃守田) – 11명 한국인; 2명 일본인
사공남 (砂工南) – 2명 한국인
사동 (沙洞) – 40명 한국인; 2명 일본인
힌리 (新里) – 7명 한국인
간령 (間嶺) – 10명 한국인
남양동 (南陽洞) – 57명 한국인; 9명 일본인
수층 (水層) – 1명 한국인; 1명 일본인
대하동 (臺霞洞) – 34명 한국인; 6명 일본인
현포 (玄浦) – 50명 한국인
광암 (光岩) – 10명 한국인
나리동 (羅里洞) – 30명 한국인
창동 (昌洞) – 6명 한국인; 2명 일본인
죽암 (竹岩) – 11명 한국인; 5명 일본인
와달리 (臥達里) – 2명 한국인
저동 (苧洞) – 62명 한국인; 5명 일본인
왼쪽의 지도는 20세기 초에 울릉도의 한국인과 일본인 “거주자”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 그림은 울릉도에 설치한 일본해군 감시초소들이 위치를 보여준다. 일본의 감시초소들은 “望樓”라고 표시되어 있고, 그리고 우리는 1905년 지도가 인쇄된 당시에 3개의 일본 군대감시초소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 아래에는 한국과 일본인들의 마을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인들 마을은 “日本人部落居留(일본인부락거류)”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한국인 정착지는 “韓人部落(한일부락)”이라고 적었다. 번역은“..외국인 땅에 거주한 일본인과 한국의 정착지…”

이것은 명확하게 일본인들의 울릉도 거주는 통과자들이거나, 일시적인 거주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독도에서 이런 활동은 대부분 전적으로 불법적인 울릉도 항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을 일본의 일부로 간주하지 않았다.

1902년 울릉도 보고서의 제 7 부 – 울릉도 어업상황
“..이 섬의 어업시즌은 보통 3월에서 9월 사이이며 해산물은 전복, 복어. 한천, 김, 그리고 몇 가지 해초들이다. 대부분의 어부들 구마모토(熊本ノ天草)의 아마쿠사(Amakusa), 시마네 (島根) 오키 그리고 미에(三重ノ志摩地方)에서 온다. 한국인 어부들은 이 섬에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전라도 삼도(三島)에서 매년 와서 해변에 자라는 다시마를 채취하여 간다. [삼도(三島)는 오늘날 거문도 (巨文島)다.]

또한, 섬 동쪽 약 50해리에는 3개 작은 섬들이 “량코도” (리앙쿠르 바위섬(독도)), 라고 부르는데 일본의 거주자들은 마츠시마(松島)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전복이 있고, 따라서 몇 몇 어부들이 거기에 간다. 그러나, 식수는 부족하여 오랫동안 어업을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들은 이 섬(울릉도)에서 4 ~5일 머문 뒤에 돌아왔다….”

위 울릉도 어업에 관한 부분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일본의 다케시마 로비스트들은 울릉도에 거주하는 한국들은 대부분 농업인들이고 해양기술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독도에 갈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바처럼, 울릉도에 있는 많은 한국들은 해마다 전라도에 있는 거문도에서 울릉도로 항해하였다.

이 거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먼 약 550km 거리이다. 이규원의 1882년 측량 그리고 울릉도 일기는 역시 기록하였다. 한국인들은 거문도, 초도, 그리고 전라도 낙안에서 배로 울릉도로 항해하여 왔다. 이규원의 기록은 다른 기록 가운데서 이들 한국 목수들을 기록하고 풍부한 울릉도 목재를 활용하여 배를 만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지도 오른쪽에는 한국의 남쪽 전라도가 분홍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밝은 녹색 표시는 어떻게 이들 용감한 사람들이 울릉도에 도착하기 위하여 봄에 상당한 거리를 항해하였는지 가능한 항로를 표시하고 있다.

다른 7번 부분에서는 미국인이 독도(리앙쿠르)에서의 일본의 활동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리앙쿠르 어업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하던 어업과는 달리 선호하던 지역이 아니었다. 독도는 식수가 부족하여 머무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일본 어부들은 일본에서 직접 독도로 직접 어업활동을 하러 오지는 않았다. 오키섬에서 항해하려면 두배의 항해시간과 재료의 부족, 그리고 식수가 부족했다.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본토에서 독도 항해는 가능했다고 해도 비현실적이었다.
1902년 울릉도 보고서 페이지 9 그리고 10
지침은 마지막 두 페이지 자료는 위 지도에서 자료로 잘 나타나 있다. 9 페이지 그리고 10 페이지 기록은 울릉도에 사는 일본인들의 집이다. 여기서, 대부분의 울릉도에 사는 이들 불법체류자들은 시마네현에서 온 사람들이다. 비록 일본인 스스로의 눈에도 그들은 울릉도의 진정한 거주자가 아니었다.

1883년, 일본의 도해자들은 강제적으로 일본정부에 의해서 퇴거당했고 울릉도 도해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압도하게 되었고 일본경찰이 영구적으로 주둔하게 되어 울릉도를 통제하게 된다. 다시 우리는 일본인의 리앙쿠르 바위섬(독도) 활동은 울릉도에 민간인 침범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04년 9월 25일 일본 전함 니이타카(新高)의 항해일지
1904년 가을, 한국의 울릉도에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일본 전함 니이타카의 항해일지는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에 관한 간단한 기록을 남긴다. 간단히 말하면, 한국의 이 섬에 대한 인식은 확고한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한국들은 일본이 이 섬을 편입하기 6개월 전부터,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위: 9월 1904년 일본 전함 니이타카의 항해일지의 명확한 증거에서 한국들은 일본이 이 섬을 점령하기 이전에 독도를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독도”라는 명칭은은 여기에서도 한국인들이 사용하였다.
“…다음은 울릉도에 실제로 있는 관측자들의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에 관한 언급이다.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을 한국들은 독도라고 부르는데, 일본인들은 당시 Riangko라고 짧게 말했다. 첨부된 자료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서도는 약 400 feet 높이이고 절벽으로 올라가기 어렵다…..”

페이지 5
“그러나 동도는, 상대적으로 갈대와 함께 낮으며, 그 위는 평평하여 2-3개의 건물을 지을 만하다. 작은 양의 소금끼 있는 물이 동도의 동쪽 입구에서 난다. 지표수는 동도 남쪽에 “B”라고 표시한 부분 5.4 미터 아래에서 나온다. (첨부된 지도 페이지 7 위를 참고) 그것은 매우 많은 양이며 년중으로 마르지 않는다. 서도에는 명확히 “C”라고 표시한 부분에 물이 난다.(첨부된 지도 페이지 7 위). 섬 주변에는 흩어진 바위가 있고, 큰 것들은 그 위에 열장 가까운 다다미를 펼칠 수 있는 것 같다. 그 바위들은 언제나 거기에 서있다. 거기에는 역시 많은 숫자의 강치가 있다. 배들은 두 섬을 연결할 수 있고, 그리고 작은 배는 해변에 끌어댈 수 있다. 거기에는 항상 강한 바람이 불고, 그때 어부들은 울릉도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들은 울릉도에서 항해하여 와서, 독도 섬에 올라가 강치잡이를 하는 일본 배들과 함께 60~70개의 돌로 움막을 만들었다. 그들은 각각의 항해에서 10일 정도 머문다….”

6 페이지
“그리고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다. 거기에는 흔히 40-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을 때도 있다. 그가 말하기를 물이 부족하여 몇 번 섬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여기서 다시 독도는 어업과 강치사냥이 이루어지던 기지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어부들과 강치 사냥꾼들은 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섬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독도 그리고 20세기 초 일본의 영토인식
역사적 기록 일본은 20세기 초 독도를 한국영토로 간주하였음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위 문서들은 독도주장을 펴기 위하여 한국의 자료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이들 문서는 상식적인 문제로 의도하였고, 일본군대가 섬을 편입하기 직전에 긴밀하게 울릉도와 독도에 관여된 사람들의 영토인식을 밝히기 위한 상식적인 시도이다. 울릉도에 거주하는 일본의 거주자(불법적)들 만큼 일본의 국가 경계를 잘 아는 사람이 누구일까?

울릉도의 일본인 불법체류자들은 기껏해야 섬의 상황에 대해서는 조금밖에 모른다. 그들은 보통 울릉도의 수역에서 계절을 따라 어업을 하던 사람들이고, 가을이면 고향으로 돌아가던 사람들 임시 거주자들이었다. 당시 조선~일본의 어업협약에 따라, 일본의 어부들은 그들이 채취한 해산물에 대해서 세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그들은 이들 일본인들을 비난하지 않았고 이 지역에서 상황에 밝은 빛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불법적으로 어업과 목재를 벌채하는 일본 사람들이 울릉도에 살면서, 도리어 의도적으로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울릉도에 합법적으로 일년 내내 살고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과는 대립되는 것이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도에서 일본의 어업 그리고 항해활동은 울릉도를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일본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몇 가지 요인들 때문인데, 예를 들면, 일본에서 먼 독도의 위치, 음료수의 부족, 그리고 거친 동해의 환경이다.

일본의 가까운 본토에서 왕복으로 300 km 이상 항해하는 거리는, 기구를 갖춘 일본어부들에게 척박한 바위는 해로운 것이었다. 리앙쿠르 바위섬(독도)은 동해의 한가운데 있다. Liancourt 주변 수역들은 흔히 매우 연중 150일 비가 오는 거친 바다다. 이 지역 85%는 언제나 구름이 끼거나 비가오고, 눈이 온다. 독도는 본질적으로 이 험난한 환경에서 거주지를 제공할 수 없는 척박한 바위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독도의 음료수 부족은 Liancourt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는 대부분이기록에서 상세히 언급되고 있다. 독도의 음료수에 관한 가장 좋은 역사기록은 일본 전함 대마도호의 1904년 11월측량 기록이다. “..거기에는 산꼭대기에서 흐르는 몇 개의 장소가 있으나, 양이 많지 않고 식수원도 강치들의 배설물로 오염되어 있다. 화학성분 검사결과는 아래와 같고, 그 물은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주된 섬은 척박한 바위로서, 거친 바다 바람에 노출되고, 거주할 정도의 크기를 만들 장소가 드물다. 음식을 끓일 연료, 마실 물, 그리고 음식도 없다.”

앞에서 말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일본의 어업 그리고 독도 주변 강치잡이 사냥꾼들은 가장 근접한 한국땅 울릉도를 거점으로 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울릉도와 독도의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은 독도를 한국의 강원도에 속한 땅으로서, 일본으로 편입되기 몇 달 전까지 울릉도 부속된 섬이란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