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양측이 일본인~한국인 역사적 지도 그리고 문서들로 논란을 하고 있지만, 독도 지역의 기본적인 지리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일본인 그리고 한국인들이 수 백 년 전에 이 수역을 항해하는 동안에 본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동해에서 자주 항해하던 사람들은 어느 지역이 자기들의 땅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라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이 페이지는 한국주변의 각기 다른 위치에서 실제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독도~울릉도 지역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도록 독자의 눈을 키워주고 있다. 이들 이미지들은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의 역사적 문서 그리고 지도에서 참고로 하였다.
역사적으로 독도는 울릉도에서부터 바람과 해류를 따라 약 하루의 항해거리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독도에 오려면 전투를 하다시피 하여야 올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기록에는 2일 반을 항해하여야 일본인이 울릉도로 가기 위한 도중에 독도에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아래 齋藤豊仙-Saito Hosen의 언급 참조) 그러나, 돗토리 요나고 (오늘날의 시마네현) 공식 일본인 도해에서는 한국의 울릉도에 가기위해서는 3일을 가야한다고 하였다.
아래는 18 세기 한국의 그림이다. 이 지도는 울릉도 그리고 우산도(독도)를 보여주고 있다. 우산도는 올바른 위치인 동쪽이 아니라 서쪽 위치에 그려져 있다. 붉은 선은 울릉도에서 울진으로 그어져 있음을 주의해 보라. 이 선은 “바닷길 2일 거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울릉도에 자주 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사실상, 한국인 기록에 울릉도 항해는 512 A.D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1618년 일본 시마네 무라가와 가계에서 기록된 것 보다 1,000년 전부터 한국인은 가시적 거리에 있는 독도에 살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 사진, 그리고 이 페이지에서 다른 그림들은 한국인 사진작가 김철환씨가 찍은 것이다. 그는 고대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 문서에 기록된 것을 검증하기 위해서 독도지역의 이미지를 찍으려고 많이 노력한 분이다.
두 사진들은 울릉도의 서쪽 태화동의 언덕에서저녁에 찍은 것으로 울릉도 거주자 김남희씨가 2008년 가을에 찍은 것이다. 한국의 산들은 해질 무렵이면 명확하게 보인다. 1696년, 한국인 관리 장한상이라는 수토사가 조선의 울릉도에서 한반도의 산들이 보인다고 언급하였다. 張漢相의 1694年 점검- 韓国의 蔚陵島事蹟
이 언급에서 말하기를, ..(오키 섬)에서 북서쪽으로 더 나아가기를 2일 낮과 하루 밤을 가면 마츠시마(松島-독도)에 이를 수 있다. 거기에는 다케시마 (울릉도)가 있는데 하루의 여행길이 더 필요한 거리이다. 이 두 섬들은 사람이 살지 않으며 그리고 거기에서 고려(조선) 땅이 보이는데 마치 운주(雲州Onshu)에서 은주(隱洲Oki)섬을 보는 듯 하다. 따라서, 이 땅을 (오키 국) 일본의 북서쪽 경계로 표시한다…”
위 사진들은 울릉도~독도 지역에서 한국땅의 가시성을 확인한 것이다. Saito Hosen은 일본의 서쪽경계를 오키섬으로 한정하고 가시성의 범주로 땅의 영토권을 사용한 것이다. 단순하게 보아 그는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그는 거기에서 한국 땅이 보이기를 마치 일본에서 오키섬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이토 호센(Saito Hosen)의 오키에 대한 그의 언급은 약 200년 후에 지도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이 언급은 막부가 울릉도는 한국땅이라고 한 1696 안용복 사건 이후 한참 뒤에 그려진 지도이다.
따라서, Saito Hosen가 일본의 서쪽 끝이 오키 섬이라고 한정하여 정의한 거의 2백 년 후, 일본 지도제작자들은 울릉도/독도 그리고 한반도 사이에 영토적인 강한 가시적인 유대감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몇몇 일본(정치적으로 의도를 가진) “역사가”들은 좁은 견해로서 Saito Hosen의 언급이 독도(松島)에 대한 일본의 주권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일본의 막부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1696)의 외부섬이며 조선의 일부 (1836)라고 선언한지 일세기 이후에 Saito Hosens의 인용이 울릉도 인근과 독도를 언급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Nabashi의 캠프는 3일 여정에 있는 강원도에 있다. 가까운 바다 해안 지점에서, 날씨가 좋으면, 하나의 섬 다쥬레(Dagelet) (울릉도)가 보인다. Kato의 질문에 대해서 어떤 한국인 지수들은 그것이 후지산이라고 잘못 대답한다. 일본인들에게 – 숭배하는 모국의 산 그리고 아름답고 영원한 기쁨의 산. 일본인들은 즉시 공손히 모자를 벗고 꿇어앉아 오랫동안 쳐다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졌다. 이것은 일본인들의 수사적인 일을 잘 묘사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 영토분쟁에서 간과하는 것은 독도에서 울릉도를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래 이미지들은 독도에서 찍은 울릉도 사진이다. 우리는 독도에서 울릉도를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울릉도 성인봉 산은 해수면 높이가 거의 1,000미터에 이른다.
아래는 독도에서 울릉도로 찍은 랜덤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여러 관광객이 찍은 것 그리고 어떤 것은 독도 박물관 그리고 동북아역사재단의 독도 연구센터가 제공한 것이다.(이미지를 두 번 클릭하시오)
이 사진 동도의 꼭대기에서 찍은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아주 좋은 망원렌즈를 쓴 것 같은데 해가 서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저녁 무렵에 찍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진작가들의 위치는 동도의 등대, 감시초소 또는 해안에서 찍은 것이다. 이마 이 사진도 한국의 독도 해양경비대가 찍은 것 같다.
1696년 일본은 일본인이 이 섬에 어업을 하는 분쟁사건 이후 울릉도를 한국에 할양 “ceded”하였다. 1696년부터, 막부는 일본인들의 울릉도 항해를 금지시켰다. 이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어부들은 불법적으로 위험한 어로활동을 위하여 가는 중에 독도를 들렀다.
몇 몇 잘못된 설명에서 사진이 조작되고 앞에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울릉도에 비해서 독도의 위치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거짓이던 아니든, 다른 이미지들 그리고 역사적 기록을 수 년 간 찾은 끝에 독도의 가시성을 회의적으로 말하던 일본인 로비스트들은 조용해졌다.
Dokdo-takeshima.com은 한국의 논쟁을 세우기 위해서 사진은 망원렌즈를 사용하지 말아야하며 그리고 50mm 또는 그보다 적은 렌즈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한국인 네티즌 그리고 정부공무원들이 방문하였다.
나중에, 망원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울릉도에서 독도를 찍은 근거있는 사진들이 인터넷에 흔하게 올라왔다. 사진 오른쪽에는 역시 울릉도 동쪽 편에서 독도를 찍은 사진이다. 앞의 땅에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 섬에 가까운 바다에서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련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울릉도 남동쪽 약 30-리 그리고 일본의 오키 주로부터 북서쪽 거의 같은 거리에, 사람이 살지 않는 섬이 있다. 날씨가 맑으면 울릉도 산꼭대기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 어부들은 이 섬을 “Yanko” (리앙쿠르 암초(Liancourt Rocks) – 독도)라고 부른다…”
흑룡어업지침에서 독도를 한국 수역편에 넣고 한국의 강원도의 일부라고 표시한 것은 주의깊게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것은 울릉도와 독도 근해 수역에 대해서 친숙한 지식이 있는 일본인들의 영토인식을 보여준다. 오른쪽 사진: 왼쪽 빈 공간에 강원도(江原道) 글자를 볼 수 있다.
번째 기록은 1694년 9월 수토사 장한상이 기록한 울릉도 사적(史蹟)이다.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침범한다는 소식을 듣고 울릉도를 수색한 후에, 장한상은 본 바를 기록하였다. .
이 기록에 쓰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동쪽을 향해 바라보면, 남동쪽 멀리에 섬이 하나 있다. 크기는 울릉도의 약 삼분의 일이고 거리는 약300 리 [120 kilo미터] 떨어져 있다…”
장한상은 멀리서 독도를 보았고 거리를 과장하여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독도가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울릉도 사적은 일본역사가들이 독도가 울릉도 해안에서 볼 수 없다는 잘못된 주장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가시성 요인 이외에도, 이 기록은 조선의 영토인식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언급에서 장한상은 자기가 독도를 보았고 그리고 나중에 일본은 보지 못했다는 말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것은 한국이 독도를 일본 밖으로 보았으며, 한국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결론이 된다.
숙종실록의 7월 22일자 기록은 독도를 언급하고 있다.
강원도암행어사 조석명은, 영동지역의 해안방어가 허술함을 논하고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나는 항구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은 바, “.평해 (平海) 그리고 울진 (蔚珍) 은 울릉도와 가깝고 바닷길에는 애로가 있다. 울릉의 동쪽으로 보이는 것은 일본의 경계에 인접한 섬이다…” 1708년 그리고 1712년 이상하게 생긴 배가 고성 (杆城)해안에 다가와, 보니 일본 배가 자주 오고가고 하였다…”
이 문서는 한국인들이 이 해안 지역에서 1905년 일본인이 이 섬을 병합하기 이전에 독도의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나아가 가장 가까운 섬 (한국의 울릉도) 해안에서 독도의 가시성은 이 기록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최근에, 1714년 기록은 18 세기 한국인들이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시켰음을 분명히 하였다. 한국 암행어사 조석명은 이 섬이 울릉도 동쪽에 있으며 일본의 경계에 가까운 “인접” 또는 “경계지역 위에” 있으나 일본 땅은 아니라고 했다. 20 년 후, 또 다른 한국 역사적 문서 기록에는 조선의 울릉도에서 독도의 가시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기록은 1714년에 나온다.
약간 붉게 칠한 그림은 울릉도에서의 해안에서 독도의 가시적인 거리를 보여 준다. 우리는 날씨가 좋다면, 독도는 해수면에서 약 54km 떨어져 있다.
이 러시아 지도는 독도가독도의 해수면 가장 작은 지점에서 보아도 26km 지점에서 명확하게 보이고 있다. 가장 큰 위 왼쪽 그림은 독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본 그림이다. (울릉도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모든 이미지들은 맨눈으로 본 것이다. 독도의 서도는 Olivutsa라고 명명 되기도 했도 그리고 동쪽 섬은 Menelai라고 불리기도 했다.
일본인 군대 한국 주둔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 , 울릉도와 독도가 이 링크에서 나타난다.
한국의 조잡한 지도들 그리고 기록은 자기들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발달된 19 세기 서양 지도 제작기법 또는 군대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기록은 한국인들이 일본이 1905년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하기 전에 독도를 인식하고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한국인 일본인들이 울릉도 (링크)에 도착하기 천 년 전부터 독도의 가시적인 거리에 살아왔다는 것은 독도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위 지도들 그리고 기록에서는 한국인들은 한국 본토에서 마음대로 이틀간의 항해로 울릉도에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수산물 채취에 의존하던 이들이 채취를 위해서 울릉도 동쪽으로 몇 시간 더 항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