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1904년-1905년) 중의 독도 편입은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연구되어야 하고, 한국(남과 북), 중국, 러시아, Philippines 그리고 미국의 영토 구분이라는 전체적인 과정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일본의 전후 독도 영토 주장은 Ainu Moshiri의 식민지화, 오키나와 그리고 이 움직임으로 연결되고 이와 함께 북방 섬들의 주장은 일본의 과거 팽창주의자들의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으로 간주되었다.
15세기 한국 간행물 기록에서는 독도의 존재가 나타나고, 한국정부는 15세기 이후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과 분리될 수 없으며, 만약 울릉도가 한국 영토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독도도 마찬가지로 한국의 영토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울릉도를 한국의 소유로 간주하고 독도의 소유권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주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마라도를 부속 섬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가 같다.
일본 해적의 울릉도 침략 1.
1618년, 도쿠가와 막부(幕府)는 시마네 현을 통하여 요나고(米子)의 Otani Jinkichi와 MuraKami Ichihei 가문에게 울릉도로 통행할 수 있다는 허가서를 발행한다. 그 후 78 년 동안 이들 두 가문은 울릉도에 항해하였다.
1667년, Izumo-현(Izumo 국)의 家臣 사이토 호센은 1667년 그의 영주의 명령으로온슈 (오키 섬)을 조사하고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Ohshu Shicho Goki-隱州 섬에 대한 기록)를 저술하였다. 그 책의 1권에서 독도는 “마츠시마(Ma대마도 -松島)”로 호칭하였고, 울릉도는 “다케시마”로 호칭하였다.(링크를 보시오)
1693년, 동래의 안용복과 어부들은 울릉도의 일본인들과 충돌하였다. 그와 박어둔은 요나고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해서, 1696년 幕府는 울릉도를 한국의 소유권으로 인정하고 일본인이 그 섬에 도해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계속해서 섬에 몰래 건너갔고 비밀리 그곳의 나무를 베었다.
1877년 3월 29일, 일본의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는 not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문서를 발간하였다.(링크를 보시오) 이 결정은 그해 4월 9일 시마네현으로 전달되었다. 1880년, 일본 전함 아마기(Amagi)가 울릉도를 측량하고, 1882년 12월, 한국정부는 울릉도를 개발하는 법령을 발표한다.
1883년 3월, 일본정부는 울릉도(Matsushima -松島)가 한국 소유임을 확인하고 일본인이 섬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해 10월, 비밀리에 불법어로와 어업에 종사하는 전체 254명의 일본인들을 철수시켰다.
오른쪽 한국신문 만화에는, 고대 한국과 일본 어부들의 논쟁을 말하고 있다. “다케시마는 국제법 상으로 일본에 속한다…”고 일본의 어부가 말한다. “탐욕스런 일본팽창주의가 영토를 탐낸다.!” 분노한 한국인들이 말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정부는 일본인들을 섬에서 추방하였다. 1898년, 울릉도 군수 배계주(裵季周)는 일본 마츠에로 가서 소송을 하고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의 불법벌채에 관하여 일본 화폐로 300원을 보상받았으나 일본인들에게 돈을 빼앗겼다.
1905년 5월 28일, 일본과 러시아 함대 간에 큰 해전이 발생한 2달 후(링크 1, 2) 일본해군은 독도에 망루를 세웠다.(링크 1, 2, 3,) 나아가 1904년 9월 29일, 나까이 요자브로(Nakai Yosaburo)는 Liangcourt 바위(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외무대신, 내무대신, 그리고 농상공부대신에게 독도임대를 신청하였다.
왼쪽으로, 한 사람의 한국인 배우가 자기 자신을 독도로 분장하고, 다른 한 배우는 1905년 일본제국인 군인으로 꾸미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을 일본의 팽창주의 식민지 시대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한국영토에 대한 근대의 재침략으로 보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점령할 때까지,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한국영토인 울릉도에서부터 분리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모든 섬들에 대한 한국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19 세기 말경, 일본해군 수로국은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였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은 공시 No.40에서 다케시마(독도)가 등기소에서 자기네 관할구역으로 들어왔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이 그 사실을 안 것은 1906년 3월 말이다. 시마네현 관리집단들이 독도를 조사하러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고, 그 섬이 일본영토로 편입된 사실을 통보하였다. 심흥택(沈興澤)은 즉시 이 사실을 중앙정부에 알렸다. 이 일이 있기 4개월 전 한국은 일본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고, 1906년 3월 伊藤博文은 총독으로 서울에 부임하여 한국정부를 대신하여 외교권을 행사하였다. 같은 해 7월 시마네현은 나가이 요사부로가 경영하는 다케시마 어업수렵회사에 독도를 임대하였다.
1910년도 말의 울릉도 인구통계는 다음과 같다: “일본인 거주민은 전체 224가구로; 대부분 오키노 섬에서 온 사람들이며, 섬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비율은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
오른쪽 지도는 일본해군 측량 독도 지도. 그것은 전함 대마도호의 부함장 Yamaka가 그린 것이다. 섬은 독도가 편입되기 몇 개월 전에 군대 망루건설을 위하여 측량되었다.(지도를 클릭하면 확대하여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2년 일본인은 울릉도에 656명(186 가구)가 거주하였고 그들의 원래거주지는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오이타현, 그리고 혹카이도이었다; 1917년 가구수는 400 ; 어업조합은 1914년 2월에 결성되었으며, 1922년 말 가입자 중에는 245명의 한국인들과 130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1939년 4월 24일, 독도는 오키섬 Gokamura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해군이 사용하고 Maizuru 해군 기지의 통제 아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재무부 소관의 국가재산으로 등록하였다.
따라서 북방 섬 혹카이도는, 아이누 모시리(Ainu Moshiri)의 일부로서 일본에 편입되고, 일본은 류큐 왕국, 대만, 한국, 중국, 몽고,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을 침략해 들어갔다. 이 침략 과정에서, 일본은 국민국가를 발달시키고, 식민지를 확장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일본 황국 신민들은 아시아 지역과 국가들을 침략하고 아시아와 태평양에 군인, 경찰, 땅주인, 민간근무자, 농업인 그리고 이민 어업인, 상인 그리고 공격적 기업인으로 진출하였다.
아이누 모시리, 혹카이도,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일본인들은 다수를 차지하는 거주민이 되었다. 이것은 마이크로네시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지역에서, 일본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말살하고 그들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본정부는 모든 지역을 일본화하려고 애썼고 식민지화하였다.
1946년까지, 모든 그 지역민들은 일본천황의 황국신민이 되었고, 정부는 이 천황 제도를 모든 식민지에 강요하였다. 일본인들은 아직 이 天皇制(tennosei)를 유지하고 있다.
1. 일본의 북방확장
일본의 제국주의자들 아이누 땅을 일본영토로 바꾸고, 그들의 교역권을 빼앗고, 일본 속에 복속시켜, 일본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들을 말살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아이누 모시리에 침투한 일본인 “이민자”들은 아이누의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그들이 살고 일하는 땅을 약탈하였다. 아이누가 사는 많은 “Kotan”(마을)이 사라졌다.
러일전쟁 후에, 일본은 아이누 모시리가 사는 사할린의 남쪽 절반을 영토로 차지하고, 일본인들은 새로운 땅으로 들어왔다. 1926년과 1927년, 남쪽 사할린 원주민들은 강제적으로 “Otasu no mori” 또는 Otasu(나무 숲)이라고 불리는 좁은 보호구역으로 이주를 당했다.
1876년 3월, 일본정부는 Bonin 섬들을 내무성 산하에 두고 일본영토로 편입시켰다. 1882년 모든 섬 사람들은 일본의 국적을 획득하였다.
3년 후 1879년, 일본정부 군대와 경찰이 류큐 왕국에 파견되어 그것을 일본제국으로 편입시켰다. 천황 제도가 강요되고 왕은 일본인 친구로 되었다. 1891년 9월, 이오지마(Iojima)도 일본의 관리 속으로 복속되었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Ch’ing)은 1895년 4월에 조인된 평화조약에 따라 대만, 팽호열도(Pescadores), 그리고 요동(Liatung) 반도를 일본에 양도하였다. 이번에는 일본이 Miyako- Yaeyama 지역(Miyako, ishigaki, Iriomote 그리고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 그 섬들을 오키나와 현의 감독아래 두었다.
1914년, 일본은 독일의 신탁영토였던 마이크로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1923년과 1926년, 일본 전함 Manshu는 오키노토리시마를 측량하고, 일본정부는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9월 18일 사건)하기 2달 전에 내무성 고시를 통하여, 그 섬을 Bonins 섬 행정관 아래에 두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마이크로네시아를 미국에 양도하도록 압력을 받고 미국은 거기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하였다. 1987년, 일본은 오키노토리시마 주변을 콘크리트로 강화하였다. 오키노토리시마는 만조 시기에는 오직 70cm 높이의 바위섬으로 일본의 남쪽 경계가 되었다.
오른쪽에, 이 한국 정치만화는 일본 수상 고이즈미가 아시아를 재침하는 전함 위에서 일본의 과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의 역사 책을 만드는 것을 묘사한다.
6. 대동아 공영권
일본은 1940년 7월 국가 정책으로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건설”을 설정한다. 그리고 9월에는 제국 총사령부-정부 연합위원회에서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건설”을 위한 일본의 생활권을 규정한다.
1941년 2월, 연합위원회는 전 세계를 4개 권역으로 분류하여 대동아, 유럽, 미국과 러시아로 나누고,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질서유지에 책임을 진다.”고 선언하였다. 일본제국은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함께 세계를 분할하고 자체적인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1943년 5월, “대동아 정치지도자를 위한 일반규칙”에서는 천황 히로히토, 도죠 히데키를 포함한 군부지도자들을 포함한 일본정부지도자들과 공동회의를 가졌다. 회담에서 결정한 것은 말레이, 스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와 Celebes를 일본제국영토로 편입한다는 것이었다. 천황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은 “필수적인 자원자원 공급처”로 이들 지역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 하나의 세계”라는 슬로건 아래 태평양 많은 대동아공영권 부분에 일본군대를 파견하고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1. 일본의 영토의 축소
1899년, 일본정부는 원주민 보호법을 발효시켰다. 이 법에 따라 영토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는 그 지방 토착주민들의 보호지구로 설정되어 “부여”되었다. 아이누를 보호한다하는 핑계로 일본정부는 그들은 안전히 동화하려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 법은 “이전의 토착민”이라고 불리는 아이누에게는 아직 효력이 미친다. 1996년 4월, 이 법이 반포된 약 100 년 후 비공식위원회 “Utari 대책을 위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정부의 내무성 산하 자문위원회로 조직되어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역사에서, 적어도 중세기 후반 이후, 일본 군도, 특히 혹카이도에는 고유한 일본영토의 부분으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보고서에도 언급하기를: 메이지 유신 이후, 우리나라는 근대 국가로 출발하였고, 혹카이도의 개발과정에서… 아이누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많은 아이누가 차별을 받아 가난에 빠졌다.
아이누의 물리적인 환경은 황폐해지고; 아이누의 생활과 삶의 장은 피폐해지고; Kotan “마을”은 쇄락하고, 일본인들은 그들을 동화시켰다. 인종차별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박탈당했다. 일본인들은 아이누의 사냥과 연어어업권을 박탈하였다. 아이누 모시리의 소유권뿐 만 아니라, 일본은 다른 지역과 다른 국가들에서 침략을 중단하지 않았다.
일본은 4개 북방 섬들을 북방 영토로 언급하면서 러시아에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그 섬을 일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부민들; 일본과 러시아는 원래의 소유자 아이누 모시리(사할린, 쿠릴열도, 혹카이도 그리고 시베리아 연안국)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른쪽은 1900년대 초기 일본의 울릉도 사진이다. 한국부락(韓人部落)과 일본부락거류인(日本部落居留人)들이 이 섬에 정착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인 도해자들인 정착민들은 “외국 땅에 있는 임시 일본인 마을”에 살았다.
독도역사는 식민지 역사에서 한국의 국경선과 일본인의 우세한 지배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하지 않고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국은 동학 농민 봉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통하여 근대국가의 면모를 발달시켰으나, 해방 후 분단국가가 되었다. 독도는 한국영토의 동쪽 끝이 되고 경찰이 그것에 주둔하는 것은 일본이 그 섬을 다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한국의 거부는 단순히…로 생각된다.” 이한기 교수에 의하면, “..국제법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위한 것이고, 오늘날 국경선을 확정하는 명확한 정의에 의존하기가 불가능하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아직 제국주의 국가들 영향 아래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1910년 초, 외무대신 Komura Jutaro는 의회 예산소위원회에서 발언하기를…만주과 한국에 이민을 집중하는 것은 Yamato(일본인)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러일전쟁 전에, 일본은 섬 나라였지만,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은 대륙국가가 되었다.
아시아와 태평양 많은 지역에 침략했던 일본인들은 그 지방 사람들에게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을 것이고, 신사를 건립하고, 일본인 방식대로 명칭을 바꾸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 신사들은 파괴되었고 대만, 한국과 중국 동북부의 장소 명칭은 이름을 회복하였다.
오른쪽에, 한국여인(독도)을 탐내는 한 일본인 이웃 남자에게 한국 남자에게 “당신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거요?”라고 소리치자, 일본 남자는 “예..!!”하고 대답한다.
일본의 침략 역사는 오늘날도 아직 계속된다. 일본정부가 “북방 영토”라고 규정하는 쿠나시리, 에토로후, 하보마이(Kunashiri, Etorofu, Habomai과 Shikot-이들은 아이누 언어이다.)의 아이누 모시리는 Ainu, Uilta, Nivkh 등 다른 북방 사람들의 본거지이다. 아이누 모시리를 일본의 식민지 통제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독도재점령을 점검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 전쟁 중에, 양국은 모두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노력하였고, 일본은 독도를 소유하고 한국전체를 병합하였다. 일본이 아인 모시리를 혹카이도라고 이름짓고 그것을 일본영토로 편입시킨 것은 한국의 독도를 편입시키기 36년 전의 일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는 한국의 주권아래 있었고, 한국이 미래에 통일된 후에도 한국의 영토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근대와 현대의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본인들의 다른 나라 침략의도를 숨기려 한다면, 그들은 독도와 북방 섬들을 재침하려는 일본인들의 움직임에 직면할 것이다. 이 연구활동은 침략을 부정하려는 이론적인 의미에 부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연구자의 기본적 역사인식이다.
만일 연구자 일본의 독도 재점령 시도를 점검하고자 한다면, 그는 일본이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에서 독도 점령의 사실과 역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여야 하고, 일본인의 이민 역사 그리고, 한국과 외국 영토 사람들에 대한 식민지화를 비판적으로 조사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