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페이지에서 설명하는 첫째 안용복 사건은 1693년 봄에 발생하였다. 부산과 울산에서 온 약 40명의 한국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오타니(大谷)과 무라카미(村上) 가문의 어부들과 만나게 된다. 안용복과 박어둔은 돗토리(鳥取) 현 요나고로 납치되어 간다.
오른쪽에는 부산에 있는 동상으로, 한국은 한국인들을 두 번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인의 울릉도와 독도 침입을 항의한 안용복을 기념한다. 오늘날까지, 이 가치있는 역사적 자료를 무시하려고 시도하는 일본인 로비스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용복의 활동은 독도와 울릉도 분쟁에서 한국 주권을 강하게 표시한 것으로 남아 있다.
왼쪽으로, 한국의 울릉도는 안용복의 용감성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웠다. 안용복은 당시 정부로부터 불공정하게 대우를 받았으나 현재 한국인들은 그를 조선영토를 지킨 용기로 영웅으로 대우하고 있다. 안용복의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까지 울릉도와 독도는 모두 일본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안용복은 호키州 藩主를 통하여 幕府에게 울릉도 (다케시마)는 조선의 영토라고 항의하였고, 州의 藩主는 안용복 사건을 幕府에게 지시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였다. 幕府는 안용복과 박어둔을 나가사키로 데려오도록 하고, 여기서 대마도 당국이 그들을 데리고 가서 두명의 사자 Tachibana Saneshige과 Tadayo Saemon와 함께 1693년 12월 본국으로 송환하도록 하였다. 이들 사자들은 단순히 일반 표류자들을 송환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은 조선에 보내는 공식서간을 소지하고 있었다.
幕府를 대신하여 대마도 사절이 가져온 공식서간은 다케시마가 동해에서 울릉도와 다른 섬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한국인들의 다케시마(울릉도) 어업 활동은 불법적이고, 따라서, 울릉도는 일본에 속하고 어업 권리는 일본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편지를 받고 난 후, 조선 정부 대항하는 가능한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과의 격렬한 전쟁을 경험한 후이기 때문에 한국은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생각하여, 일본에게 울릉도는 한국영토이며, 그러나 한국인들이 다케시마에서 어업은 금지한다는 내용을 회신하였다.
“..우리나라는 어부들의 외국 바다 도해를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영토 울릉도에 도해도 너무 멀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에게 우리 경계를 넘어 갈 수 있도록 허락하였겠습니까? 우리는 귀국의 우호 선린적인 자세에 감사드리며 귀국의 다케시마 영토로 항해하여 들어간 문제의 배를 회송시켜준데 감사드립니다. 어부들은 어업으로 생활을 하며, 폭풍우에 표류되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도해 행위와 깊이 침입한 것은 법으로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현재 법에 의하여 범죄행위로 처벌될 것입니다…”
첫째, Tachibana는 조선으로 가기를 주저하였는데 왜냐하면, 그는 “소론(小論)” 파가 권력을 잡고 있으며, 남구만(南九萬)은 일본에 대하여 강경노선을 택하고, 숙종 왕에게 울릉도를 일본에게 양도하지 말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일본인이 “우리영토 죽도(울릉도)”라는 단어를 삭제하여 달라는 요구는 결국 울릉도 섬을 차지하려는 목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숙종 왕에게 울릉도로 항해하는 일본인들을 처벌하도록 건의하였다.
그 외에도 만약 일본이 울릉도를 점령할 경우에 강릉과 삼척 지역도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울릉도에 군사 진지를 건설하는 문제도 논의하였다. 장한상(張漢相)은 삼척지구 부대장으로 임명을 받고 울릉도로 가서 진지구축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 여기서 장한상의 울릉도 보고서를 보시오 ) 논의의 중심에는 남구만과 윤지완(尹止完)이 있는데 그들은 노론파로서 일본에 대하여 유화정책보다는 강경책을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조선의 답신을 변경하려는 다치바나의 협상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울릉도는 울진현의 바다 한 가운데 있으며, 험한 조건 때문에 바닷길은 불편하다. 따라서 거주민들은 철수되고 섬은 현재 비어있지만, 조사를 위하여 관리는 가끔 파견된다. 산천은 수려하고 지형은 불규칙적으로 고불꼬불하다. 울릉도의 주민과 생산물에 대한 이 기록은 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으며, 그 내용은 시대를 이어 계속하여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 어부 두 사람이 그 섬으로 갔는데, 우리나라 영토를 침입한 어부들을 우연히 만나 서로 충돌하였다.
두 명의 한국인 어부들을 불법적으로 납치하여 에도로 데려 갔지만, 에도 막부의 장군의 배려로 그들은 귀환되었음을 감사히 여기고 있다. 그 일은 우리나라 울릉도 해변가 어업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대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 섬은 같은 섬을 죽도(竹島-대나무섬)라고 다르게 부릅니다. 하나의 섬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책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 도의 국민들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경계를 넘어와 여러 가지 분탕질을 하고 조선인을 납치하지 않는 것이 도리일 것인데, 봉서에서는 도리어 죽도를 귀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한국인들의 어업을 금지시키는가? 이 사건은 쇼군에게 보고하고 해변에 사는 귀국의 국민들이 울릉도로 항해하여 사건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대마도주 내 Yoshitsugu는 幕府 사절 유칩일에 의하여 문책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조선의 회신을 거부하고, 한성(서울)에서 동래로 와서 일본사절을 만나러 온 역관은 편지를 전달하고 접대하라는 조정에 명령을 수행할 수 없어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Tachibana가 기대한 바와 같이 첫째 편지에서 문구를 삭제하는 협상은 조선의 강경책으로 다음해 1695년 6월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대마도는 Tachibana와 함께 큐슈의 이름난 이론가 Suyama Akira(Suyan Shouemon)를 파견하여 회신의 내용을 바꾸려고 협상한다. Suyan는 동래부사에게 편지를 전하고 왜 조선이 편지를 개정하기를 거부하는지를 묻고 1695년 5월 그 편지를 조정에 전하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고서에 울릉도는 82 년 전인 1614년에 공도정책을 시행하기 전부터 조선에 속한다는 점을 인용하면서 계속 그것을 거부하였다.
우리가 더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696년 1월 幕府는 최종적으로 로주의 이름으로 호키주와 대마도에 공식서간을 보낸다.
공식서간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가 포함된다.:
“..다케시마는 인바슈에 속한다고 말하여 왔지만, 그러나 일본인들은 거기에 산 적이 없다. Tokugawa Iemitsu의 3대 쇼군인 Itokukun 시대에, 요나고(米子)의 상인들이 거기에 어업을 위하여 요청을 하여 허락하였다. 지리적으로, 그 섬은 인바슈에서 160 리(640 kms) 떨어진 반면, 조선에서는 단지 약 40 리(160 kms)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조선의 영토이다. 이 나라는 군사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이 작은 섬에 대하여 상호간의 교린과계를 해치지 않는 것이 우리 정책이다. 처음부터 그 섬은 조선으로부터 힘으로 뺏은 것이 아니며,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돌려준다고 해서 의미는 없다. 오직 해야할 일은 영구적으로 일본인들이 거기에 가서 어업활동을 하지 않도록 금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실을 조선에게 알려야 한다. …”
그러나, 1696년 여름 예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울릉도 분쟁에서 대마도가 편지를 즉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여 해결되지 않음으로서, 안용복은 일본인의 울릉도 침입과 어업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기로 결정한다. 안용복이 이끄는 11명의 한국인 집단이 울릉도와 독도(당시 松島)를 거쳐 인바슈(현재 돗토리 현)과 호키주(돗토리 현)로 가서 幕府에게 직접 울릉도(竹島-다케시마)과 독도(당시 松島)는 조선의 영토임을 항의한다. 안용복은 그의 어부들과 함께 1696년 봄에 울릉도로 가서 일본인들 몇 명과 어선들이 섬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시 안용복과 그의 일행들은 직접 오키를 거쳐 인바슈로 가서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해서 항의하였다. 그들은 인바슈 당국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그들은 울릉 자산 양도 감세관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정부의 항의서를 인바슈 당국에 전달하고 일본인들의 불법 울릉도항해를 금지시키도록 幕府에 요청하였다.
조선국 기록에 의하면 인바슈 당국은 대마도주에 의하여 울릉도와 독도에 침입한 자들을 처벌할 것을 약속하였고, 만약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조선 정부는 일본에 공식문서로 소송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저는 자산도(子山島) (송도(松島)/독도)로 가서 거기에 도착하였는데, 일본인들은 큰 솥을 걸고 물고기를 요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무막대를 들고 그것을 내리치고, 그들에게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황급히 짐을 싸고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배를 타고 그들을 뒤쫓았지만, 그러나 저는 갑자기 폭풍을 만나 오키 섬으로 표류하여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섬의 촌장이 저에게 묻기를 제가 왜 거기에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기를 “제가 몇 년 전 여기에 왔을 때, 울릉도와 자산도(子山島)는 조선의 영토라고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식서간 (이것은일본인들이 이 섬 지역에 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결정한 것을 의미한다)을 관백이 만들어주었습니다. 아직 이 나라는 적절한 방식으로 취하지 않고 우리 영토로 다시 침범하였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여기에 대하여 그가 대답하기를 그가 확실히 백기주에 편지를 보냈지만, 그러나 오랫동안 답장이 없었다. 따라서 저는 성이 나서 배를 타고 즉시 백기주로 갔습니다. 저는 울릉도과 자산도(子山島)의 양도 감세관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본토 섬으로 가도록 요구했습니다. 저는 몇 사람들과 함께 말을 타고 본토 섬으로 갔습니다.
따라서, 저는 청색 관리 관복을 입고, 검은 모자와 가죽신을 신고 사람이 끄는 수레를 타고,다른 사람들은 말을 타고 마을로 갔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후, 섬의 藩主와 저는 방에 마주앉고 다른 사람들은 아래 마루에 앉았습니다. 藩主는 묻기를, “여기는 무엇하러 왔는가?” 그리고 저는 말하기를, “두 섬들에 관한 공식서간이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대마도주가 편지를 빼앗아 갔고, 내용을 고치고 몇 번이나 우리 영토를 침범하고 우리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들의 불법활동에 대하여 당국에 보고하고 알리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藩主는 수긍하였다. 최종적으로 이인성은 이 사건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어 왕에게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대마도 島主의 부친 백기주(Baekgiju)가 말하기를 “만일 편지가 왕에게 전달되면 나의 아들은 심한 처벌을 받게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편지를 전달하지 말아 달라..” 그의 요청에 따라 편지는 백기주 관리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영토를 침범한 일본인 15명은 처벌을 받는다. 그는 계속하여 나에게 말하기를, “그 두 섬들은 이미 귀국(조선)에 속한다. 따라서 만약 어떤 사람이나 또는 藩主가 조선 영토에 침범하거나 하면 통역관가 함께 국가의 서간을 일본으로 보내라. 그러면 그런 침입자들에게는 중한 처벌을 하겠다.…”
이 말을 하면서, 그는 약간 사람들을 우리와 함께 보내려고 했지만, 그러나 저는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어떤 편리도 바라지 않았다. 뇌헌 스님의 말씀과 다른 사람들의 말도 같은 이야기였다.
비변사 관리가 왕에게 말하기를, “다음 회의에서 여기에 관해서 우리에게 보다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도록 하십시오.”
이에 왕은 허락하였다 …
대마도는 울릉도 문제를 더 이상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고, 또한 중간 매개자의 유리한 위치를 잃고 싶지 않았다. 결국 대마도는 幕府와 협상하여 안용복을 설득하여 그의 편지가 인바슈를 통하여 막부에 전달되지 못하도록 하고, 또한 한국인들을 추방하는 식으로 다루어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결국, 울릉도와 독도 영토분쟁을 일으킨 안용복과 그의 일행은 철수되고, 그들은 조선의 표류자로 송환되었다. 안용복 문제가 해결된 후 변 동지와 송 판사는 대마도로 갔으며, 번주는 울릉도 문제에 관한 幕府 결정을 통지하였으나, 그러나 인바슈와의 접촉을 항의하고 조선에게 대마도 이외에는 어떤 지방과도 울릉도 문제로 접촉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비록 일본정부의 결정은 이미 1696년에 만들어졌으나, 조선은 대마도로부터 돌아온 사절의 보고서 그리고 동래부사의 연락에 의해서 편지가 늦게 1697년에 전달된 것을 알게 되었다.
19 세기 중엽, 일본인들은 다케시마(울릉도와 독도)는 원래 일본영토였으나, 조선에게 양도한 것처럼 쓰기 시작하였다. 대마도는 幕府가 질의한 1837년 울릉도 침범이 문제시 되었을 때 일본은 1696년에 다케시마(울릉도)를 조선에 “양도”하였으며, 그 섬으로의 항해는 금지되었다고 대답하였다. 이 성명은 다케시마가 원래 일본 섬이지만, 조선으로 양도되었다고 잘못 인식하게 만들 수 있었으며,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幕府의 지식을 오도할 수 있었다. 이런 인식은 최종적으로 막부정권이 다케시마(울륻도와 독도)를 조선에게 양도한 것은 잘못된 결정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가지게 하였다.
2005년 3월 16일 일본의 기록이 밝혀지기 전까지, 몇몇 일본 역사가들은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子山島)가 울릉도 옆의 섬 죽도(竹島)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은 몇 가지 이유에서 의미가 없다. 첫째 죽도(竹島) 섬은 울릉도에서 약 2km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그렇다면, 사실상 이들 일본인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안용복은 노를 저어서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 섬을 가기 위해서 다음날까지 모험을 하여 기다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죽도(竹島) 섬은 약 100 미터 높이의 절벽과 함께 음료수도 없고 배를 댈 만한 계류장이 없음을 보여 준다. 몇 몇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이 캠프를 차리고 가장 좋은 계류장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이런 험한 절벽이라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오른쪽 문서에는 2005년 3월 16일, 무라카와 기록으로 안용복 자신이 언급한 자산도(子山島)(독도)는 울릉도에서에서 50 리 떨어져 있다고 말했다 것이며, 이것은 다른 섬인 죽도와는 너무 먼 곳에 있다.
왼쪽으로는 사진은 안개 낀 날 서쪽에서 동쪽으로 보고 찍은 독도 이미지이다. 안용복의 일본 오키섬까지 항해는 독도를 가시적인 거리 내에서 두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목적을 위하여, 울릉도는 이 분쟁에서 가장 큰 목표이었다. 이 섬을 조선에 “양보”한 것은 당시 일본으로서는 대단한 손실이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인에게 독도는 울릉도로 어업을 하기 위하여 가는 중간에 잠시 머무는 곳에 불과한 장소로 사용될 뿐, 더 이상 독도를 탐낼 이유가 없었다. 어느 역사 기록과 지도에서도 독도에서 울릉도와 분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