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독도섬 문제에 대한 접근에서 어떤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가? 왜, 한국은 아직 1965의 협정의 근본관계 후에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일본을 적대적인 나라로서 인정하는가?
제2차 대전 후 수십년간, 서양인은 일본을 의심하였다. 이것은, 진주만과 이후의 전쟁시 악독한 일본의 기습에 원인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이차 세계대전 동안, 서양의 미디어는 일본인을 간사하고 뒤에서 중상하는 사람, 또는 탐욕인 토지 횡령자로서 묘사했다. 무엇인가 반대를 하는 일본의 과거의 정책은, 세계적인 신용을 회복하기 어려운 나라로 만들었다.
아래 좌측의 광고는, 전통적인 일본의 옷을 입고 있는 둥근 눈의(푸른 눈의? ) 애니메이션의 여자 아이를 이용한다. 그녀가 일본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고, 그녀의 눈은 눈물을 흘린다. 이상하게도, 하이라이트 된 영역, 독도 타케시마, 쿠릴 열도와 Diaoya(센카쿠)의 3개는, 고대 일본의 고유영토가 아니었다.
일본이 우익 소수 과격파들이 타케시마의 날을 사탕발림으로 꾸미는 동안, 한국인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보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묻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 시민들은 독도섬에 대한 그들의 개입의 진짜 역사를 정말로 알고 있는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동안, 그것이 모두 독도 타케시마를 위한 일본군의 병합에 근거한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는가? 아마, 일본인이 타케시마의 날의 역사의 현실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들은 한국인이 왜 일본을 그만큼 신용하지 않는가를 이해할 것이다.
JCI의 요구로부터 타케시마는 「일본영토」의 일부분이라는데 시민을 격노시킨다. 중국인, 러시아인 및 한국인의 보기 흉한 인물묘사는 다른 아시아인을 악마화하는 분명한 시도이다. 동시에, 일본의 시민은 귀여운 여자 아이나 순진한 고양이로 나타낸다. 가장 놀라운 것은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 및 대만인을 도둑 및 불법 침입자로 고발하는 것이다. 일본의 시민은 이 영역이 왜 “일본” 왜 영토인지 그리고 지키는 데 대한 실질 배경 없이 “그들의 영토” 로 배운다.
한국 위의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100번째의 기념일 전인 2010년 2월에, 일본의 오카다 카츠야 외무상은 30년 이상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데 대해 사죄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불렀습니다.
오카다 카츠야는 이에 덧붙여, “나는 한국인의 감정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아이덴티티와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나는, 우리가 희생자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짧은 동안 한국과 일본은 서로와의 관계를 개선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불과 수주 후에, 독도(타케시마)를 일본의 영역으로서 확실히 하고 있는 교과서를 승인했다고, 일본 문부성은 발표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 작은 섬에 대한 한국의 “실효 지배” 를 강하게 한다고 할 의향을 나타냈으므로, 한국은 독도 위에 일본의 주장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국회는 일본의 최근의 움직임을 비난할 결의를 채택했다.
왼쪽: 이 이미지는, 최근의 일본의 교과서로부터 나온 것이다. 일본의 교육부가 어떻게 잘못된 방식으로 선언했는지를 나타내 보이는 시마네현의 (島根県) 일부로서의 한국 경계선과 잘못 나타내 보인 독도(타케시마) 빨강색.
일본 정부가 한 가지를 말하지만, 다른 행동을 계속하는 한, 한국과 일본은 지속되는 우호를 결코 쌓아 올릴 수 없다. 개인적인 또는, 정치적 관계는 단순한 주의(예를 들면 정직, 성실과 신용) 베이스에 기초한다. 한국의 식민지화에 대한 후회를 가장하고 있는 한, 일본은 시마네현과 우익 확장 주의자의 이기적인 영토의 야심을 지지할 수 없다.
어두운/검은 해양회(玄洋社、Gen’yōsha)의 일본의 유산은, 메이지, 타이쇼와 초기의 쇼와 시대 일본 현양사 「초자연적인 해양 사회」로 활발한 유력한 초국가주의자 그룹과 비밀결사였다. – 봉건 규칙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목적으로 원사무라이의 비밀 결사로부터 시작한, 玄洋社는, 테러 활동(예를 들면 1889년의 오오크마・시게노브의 암살 미수)에 종사한 초국가주의자 비밀 결사였다. 그것은 동부 아시아 중에서 광범위한 스파이 활동과 조직범죄 네트워크를 만들고, 일본의 군사 행동을 옹호했다. 이 조직은, 일본의 팽창주의 시대에 사방으로 일본 제국을 확장하는데 이용되었다.
왼쪽은 일본 극우단체인 흑룡회의 조선 낚시 메뉴얼의 1901~1903판의 이미지인데, 일본이 어떻게 한국의 바다에 침범하고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기록은 한국의 동해안, 울릉도와 독도섬에서 낚시하는 상황을 상세히 전한다. ( link )
당초, 1차 청일전쟁과 러일 전쟁의 사이 제국 일본군과 제국 일본해군은, 일본의 군대에 의해서 무시된 – 동아시아를 통한 현양사의 넓은 정보 수집 네트워크가 매우 귀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현양사 네트워크는, 적의 정책을 늦추는 파괴 활동 활동을 실행할 때에, 군대에도 도움이 되었다.
독도-타케시마의 일본의 1905년의 병합과 관계하고 있던 저명한 정치가는 야마자・엔지로우였다. 그는 독도를 임대하고 싶다고 한 일본 시민 나카이・요우자브로우(中井養三郞)의 일기에서 러일 전쟁 동안에 군의 목적을 위해서 작은 섬을 병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다.
후쿠오카 태생의 사람, 야마자는 현양사와 가까운 사이로 생각의 대부분을 공유했다. 1904년에, 그는 러시아(정치적인 흑막으로 전 이토히로부미-이토우・히로부미 수상과 대등한 듯한 위치로 만든)와의 싸움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었다. 해군 감시탑의 설치를 위해서 독도섬을 병합하고, 시설을 하기 위해서, 야마자 엔지로는 일본 제국 해군과 협조해 일했다.
우익 단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Uyoku dantai로 문자 그대로 일본인 국가주의의 우익 단체입니다. 1996년에, 1000이상의 우익단체가 전체로 대략 100,000명의 멤버가 일본에 있다고 경찰청은 추측했다. 우익단체는 그들의 선전 차량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gaisensha(길에서 선전하며 다니는 차량(街宣車)이 확성기를 붙이고, 뚜렷하게 그룹과 선전 슬로건의 특징이 있는 밴, 트럭과 버스를 갖추었다고 알려져 있다.
왼쪽은 전형적인 일본인(타케시마 선전 밴). 밴에 쓰인 내용은 “한국인은 타케시마에서 나가세요!!” 라고 썼다.
차량은 통상 흑, 카키색 또는 군복 천으로, 황실문장 또는 일장기로 장식한다. 그들은 주로 중국, 한국, 러시아 대사관, 총련시설과 미디어 조직과 같은 조직의 밖에서 항의하는 데에 익숙하다. 거기서, 선전(테이프에 기록 또는 생방송)은 확성기로 방송한다.
…”
“국토 지리원(GSI)은, 기본적인 조사와 매핑을 운영하고, 관련한 조직에 일본의 토지의 상황을 확실히 하도록 명하고, 조사의 결과를 이 토지를 개량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제공하는 유일한 전국조직이다 …”
일본의 전국 국토 지리원에 의한 오른쪽의 지도는 시마네현 오키 제도에 독도섬을 추가되 어 나타내는데, 물론 진실하지 않다. 고의로 그들 자신의 시민 및 국제사회를 잘못하게 하기 위해서, 일본의 MOFA는, 다른 정부 기관을 사용하고 있다. 더 큰 이미지를 보려면 지도를 2회 클릭하시오.
독도 타케시마의 역사의 진실을 찾는 것은, 일본 정부에 의해서 방해받고 있다. 독도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포스트 제2차 대전 기록에 액세스 하려고 하는 한국과 일본의 연구자는,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이러한 장해(한국의 연구자에 대한)에도 불구하고, 유미림씨는, 분명히 독도 타케시마에 대한 도쿄의 지속적인 소유권의 반증을 준 2개의 일본의 정부 문서를 발견했다. 문제의 문서는, 「총리부의 조례 No. 24」, 구식의 1951년 6월 6일과 「재무성의 조례 No. 4」(같은 나이의 2월 13 날짜의 것)이다.
두 개의 기록에서는 분명히, 본래 제주도, 울릉도에 인접한 섬의 사이의 명령과 독도 타케시마는 일본 정부에서 관리 당국으로부터 제외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그러한 섬이 일본의 고유의 영역의 부분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1951년의 일본 정부가 SCAPIN-677에 따라서 2개의 조례를 공포했다고 하는 사실은, 일본에는 독도에 영유권이 없는 것을 논의의 여지없게 확인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2차대전 후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하는 증거가 더 이상 없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의 역사적인 기록을 더 이상 공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최근 2010년 5월, 일본 고등법원은 일본의 독도 논쟁에 나쁜 영향을 끼칠까 염려하여 독도 다케시마에 관한 기록을 공개하기를 거부하였다. 아래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자료와 관련하여 일본정부의 몇 가지 기록이 검은색으로 지워진 원본을 볼 수 있다.
정말 독도문제가 한일 간의 결속에 충격을 주는가?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독도노쟁은 한일관계에 커다란 장애가 될 뿐 만 아니라. 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역사적인 문제라고 밝혀졌다. 연구에 의하면 거의 50% 정도의 한국인들은 독도논쟁이 한국의 가장 큰 역사적 문제라고 말하였다.
독도문제는 위안부여성 문제를 포함하여 야스쿠니 신사참배의 반대에 관한 것보다 높은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독도문제가 단순한 영토문제를 떠나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일본인들이 독도 다케시마 문제를 자연자원의 문제에 대한 영토문제로 보려는 일본인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한국인 역사가들에게 “무식”하다고 평하면서, 일본의 1905년 전시 독도 편입의 여건에 대하여 부정하고 있다. 일본의 반복적인 변명은 지난 50년간 계속되었고, 그것은 장래에 곧 폐기될 것이다.
현대 일본은 교차로에 와있다. 아시아에서 줄어드는 영향력과 전쟁과 식민지시대의 문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사이에 일본 외무성은 시간을 맞추어야하는 방법을 변경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북아시아에서 고립되는 위험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계속해서 우익의 편을 들면서 시마네현의 영토야욕을 지지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경제적 현실에 직면하여 독도문제에 대한 주장을 철회해야할 입장에 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올바른 길로 향한 큰 발자취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