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울릉도 침략 3

일본인 벌채꾼들은 조선의 울릉도 진출을 계속한다.
이미 설명하였다시피 일본인 민간인의 침범은 일본–한국 관계를 긴장시켰다. 이에 대응하여한국정부는 울릉도 섬의 공도 정책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사람들을 정착하게 한다. 1882년 4월 29일 한국 수토사 이규원(李奎遠)이 울릉도에 도착하고 그 상황을 조사하였다. 거기서 그는 많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나무들을 베고 있음을 알았고, “마츠시마(松島)”라는 표시판을 보았다.
위 왼쪽: 울릉도–독도 지역 전체적인 지도는 일본과 한국육지의 가장 가까운 위치를 보여 준다. 위 오른쪽: 한국의 울릉도 지도.
조선의 기록에 나타난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벌채에 관한 번역

“통리기무아문(국방부)에서 나온 관리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한다. “울릉도를 조사하는 동안, 이규원은 어떤 일본인들이 한쪽 모서리에 천막을 치고 “송도(松島)”라고 쓴 팻말을 붙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통리기무아문(국방부) 대신이 그것을 질책하는 공식서간을 보내야한다고 건의합니다. 저희들은 이미 편지를 보내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벌채를 금지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수토사 이규원이 최근에 개인적으로 거기에 가서 점검해보니, 상황이 변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저희들은 또 다른 편지를 반복해서 보내서 무엇보다 그 문제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편지가 공식문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대해서 왕은 그에 동의하였다.…..”
얼마 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불법벌채를 한다는 또 다른 청원이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7월 10일 통리기무아문 관리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규원의 울릉도 보고서에 관해서 전하께서 우리가 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우리는 공식문서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불법벌채를 금지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토사가 조사하러 거기에 갔을 때, 아직 일본인들은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저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이전의 편지 내용을 강조하는 공식문서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제학(공식 문서당당)에게 이 문제를 건의해도 되겠습니까? ..?”

이에 대하여, 왕은 동의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인들이 한 때 강한 정책으로 불법도해자들을 처리하였으나 대부분 무관심한 정도로 유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서 국가로서 조선 정부는 이미 일본 외무성관리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아시아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때에, 일본은 민간인이 이웃국가들에 침범하는 정책을 부추기기 시작하고, 체류자들 또는 불법거주자에 대해서 묵과하였다.
일본정부는 한국의 요구에 일시적으로 응한다.
50년 전 幕府의 고립정책 아래서 불법체류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떠나라는 약속을 지켜왔다. 그러나, 새로운 메이지 정부의 정책 아래서 일본정부의 이들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는 1883년 일본 배가 한국에 도착하자, 정중하게 한국의 요구에 응하고 이들 일본인 체류자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1883년 3월 1일–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도해 금지령 内達案을 내린다.
1883년 3월 1일–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도해 금지령
内達案

北緯三十七度三十分東経百三十度四十九分二位スル日本称松島一名竹島朝鮮称鬱陵島ノ儀ハ従前彼我政府ノ議定ノ儀モ有之日本人妄リニ渡航上陸不相成候條心得違ノ者無之様各地方長官に於テ諭達此旨及内達候也

明治十六年三月一日
太政大臣

번역:
“…공식통지문

일본이 마츠시마(松島) 또는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섬은 한국에서는 울릉도라고 부르며, 위도 37도 30분 그리고 경도 130도 49분에 있다. 이 섬에 대해서 일본과 한국은 문서로 합의하기를 일본인은 이유없이 이 땅과 섬에 항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각 지방 정부 수장에게 통지하므로 거기에 대해서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3월 1일, 1883년
태정대신…”

메이지 초기 시대 일본인의 울릉도 활동 분석
1883년 3월 1일, 일본정부는 울릉도가 한국영토임을 확인하는 선언을 한다. 원본기록은 오른쪽에서 볼 수 있다.

1696년과 1837년 幕府가 이미 선언한 바와 달리, 독도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 기록은 또한 일본인의 항해가 일본본토 가까이에 해야 한다거나, 또는 외국배와의 접촉을 피해야한다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외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요구에 응하는 것 같은 메이지 일본 제국은 교활하게 모든 4방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일본정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령은 효력이 없었다. 기록에서 보여준 (링크) 바에 의하면, 1890년 후반, 많은 숫자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한국정부는 먼 울릉도 지역을 더 이상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