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측의 독도영유권에 관한 주장은 주로 17세기에 이 지역에 대한 항해기록에 의존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에 관한 기록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울릉도와 관계된다. 모든 역사기록은 한국이든 일본이든 마찬가지로 독도의 중요성은 울릉도와 뗄 수 없는 불가분성 때문이다. 일본의 무라카와 가문은 1617년 인근해역의 표류사건 후, 울릉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무라카와 가문은 막부에 대해서 그 지역 자원을 수집하기 위하여 항해할 수 있는 도해면허증을 신청한다. 일단의 배선단이 봄에 수 십 명의 선원들과 함께 1-2달 항해를 하고 날씨가 좋으면 돌아온다. 이 항해는 일본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경영관리”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자세히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그것은 사실과 다르고 일본의 영토도 아니었다.
위 왼쪽: 울릉도 지역 전체 지도. 위 오른쪽: 한국 울릉도 지도는 17세기 일본어부들이 80여년 동안 불법적으로 어로활동 항해를 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처음 울릉도 섬을 “발견”한 이후 80여년동안 소위 “경영관리”를 해온다. 이런 활동이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 그 당시그 섬에 공도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향나무, 자단, 오동나무, 전복, 바다사자 기름등 고귀한 물자를 채취하였다.
막부에서 호키주의 무라카와 오야 가문에게 발급한 것은 땅의 “증여”가 아니라, 외국으로의 방문 항해 허가서이다. 일본에서 여기에 대한 논란은 전적으로 ” hairyo.”라는 표현의 해석에 잘못 때문이다. 일본정부는 “hairyo”를 독도 소유권의 허가라고 강조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다 같은 표준사전인 일본어 사전과 일본어-영어 사전을 보면(Kojien by lwanami shoten and The Kenkyusha’s New Japanese-English Dictionary), hairyo는 “왕이나 귀족에게서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an expression of humility for [receipt] of a thing from a lord or a high personage.)”이다. 그것을 말로 하면, “hairyosuru”인데 이것은 은혜를 받다(“be bestowed on.)”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 두 글자의 두번째 부분에서 표현은, “hairyo”가 재산 또는 토지의 뜻을 가진다. 따라서 일본측은 “hairyo”를 잘못해석하여 “재산을 하사받거나 기증받은 것( receipt or bestowal of an estate)” 또는 “수여.” 받은것으로 해석한다. 사실상, 막부가 준 것은 토지의 “수여” “기증” “하사” 가 아니라, 단순히 독도로 항해할 수 있는 도해면허증이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울릉도로 항해하는 궁극적인 성질은 일본 땅의 경영관리가 아니라, 외국에 방문하는 여행허가서였던 것이다.
17세기에 일본 막부는 외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항해허가증을 발급하였다. 이것은 우라카와 오야 가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두 가문은 그 섬들이 두 가문에 “하사”되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실제로는 막부가 그들에게 그 지역을 항해할 수 있는 허가서를 발급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주장은 “안용복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미지와 같은 도해면허증은 오오타니, 무라카와 가문 등에게 발급된다. 이것은 땅을 하사한 것이 아니라 외국을 방문하는 항해 허가증이었던 것이다. 이런 문서는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외국을 방문할 때도 발급되었다.
울릉도 독도에 관한 일본의 개인적인 지도.
왼쪽의 지도는 1724년 일본 Yonago에서 Ulleungdo에 항해한 일본 가문의 지도이다. 이 시대의 역사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는 울릉도 독도에 관한 일본 측의 인용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의 날짜는 1724년이고 1696년 당시 일본 정부는 조선에 울릉도 소유권을 양도하고 일본 전국에서 울릉도 방문을 금지했음을 알고 있다. 이 사실에서 이 지도는 독도에 대한 정당한 요구의 기초가 된다기보다는 울릉도에 일본이 은밀하게 불법적으로 침입한 증거로 더 많이 해석될 수 있다.
더구나, 울릉도와 독도는 둘 다 포함되기 때문에 조선과 울릉도의 역사적인 관계로 참고하여 볼 때 이 지도가 섬의 소유권의 어떤 증거는 절대로 될 수가 없다. 울릉도와 독도의 또 다른 사적인 일본 어업 지도가 아래에 있다. 목적지(울릉도), 출발지(Yonago 시)가 표시되었음을 잘 보시기 바란다.
위: 일본 정부가 울릉도 지역으로의 통항을 금지한 1696년 이후의 일본 간이 어로 지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일본인들은 도해 금지령을 어기고 돗토리현 요나고시에서 조선 영토로 몰래 침입하는 행위를 계속했습니다.
이 지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독도의 유용성은 울릉도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울릉도가 한국의 땅으로 확정될 때, 일본에서 독도의 중요성은 더 이상 필요없다. 일본에서 독도를 최종 목적지로 항해한 역사적 기록은 없다.
일본과 한국의 동해안의 고대지도 – Isagawa Yusen의 1691년 지도
아래 이미지는 일본 문화역사센터에서 발견된 지도이다. 부산 외국어 대학교 김문길교수는 2006년 6월 18일 이것을 공개하였다.
그 교수에 의하면, 그 지도는 일본국제문화센터 자료실의 고대지도/문서창고에서 발견하였다고 한다. 이 지도는 유명한 불교학자인 Isagawa Yusen이 1691년에 그린 것이다. 지도의 크기는 길이가 170.8cm, 폭이 81.3cm이다. Oki섬은 시마네현의 북쪽에 있고 오키의 오른쪽은 한당(韓唐)으로 표시하였다. 한당은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한국을 칭하던 명칭이다. 김문길교수는 “임진왜란 동안 일본의 당인(唐人)들에 의해서 한국 장인들이 납치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1691년 국가지도는 1693년과 1696년 안용복 사건이 있기 전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인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인들이 울릉도 독도를 항해한 것은 영토이기 때문에 항해한 것이 아니라, 은밀한 성질의 항해였던 것이다. (Oki 섬을 더 큰 이미지로 보려면 클릭하시오.)
언급한 바와 같이 Isagawa Yusen은 그 시대에 사적인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당시에 사적인 지도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지도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Isagawa Yusen은 여행지도, 시계지도 등 여러 가지 지도를 많이 제작하였다. 이 페이지의 Yusen의 지도에는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그 당시 세계에 30판이 넘게 발간되고 있었다. 이 지도들은 일본의 정확한 영토인식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Isagawa Yusen이 1708년 그린 세계지도
1700년 경 Isagawa Yusen은 위의 세계지도를 그렸다. 우리는 다시, 일본의 영역이 동해에서 Oki섬 서쪽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으로 그의 국가지도는 한당을 일본이 아닌 별도의 외국으로 간주하고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아래의 17세기 지도는 한당지역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1710년에 Hotan이 그린 일본과 아시아 지도
오른쪽 지도는 Hotan의 전체지도로서 동북아시아는 청색 상자로 표시되었다. 아래 왼쪽은 일본과 한국의 더 상세한 모습을 보여 준다. 아래 오른쪽은 일본의 Oki 섬이 상자로 빨갛게 표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위 Oki섬은 Oki의 한당 서북쪽이며 청색 상자에 글자로 표시되었다.
이 지역은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 속하고 있으며 강원도 지역으로 표시된 글자가 위 왼쪽 한쪽 구석에 상자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나아가, 그 섬들은 한반도에 부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지도들은 이 섬들이 한국에 속해있고 Saito Hosen의 초기 지도에서 Oki 섬이 일본 영토의 서북쪽 끝이라는 내용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준다. (다음 페이지를 보시오)
위의 지도는 Oki섬의 서북쪽은 한당으로 표시되어 한반도에 부속됨을 나타내고 있다. Oki 섬은 빨간색으로 표시되었다. 한당은 청색으로 그리고 강원도는 분홍색으로 표시되었다. 따라서 울릉도와 독도는 17세기에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음을 더 명백히 해준다.
17세기 일본 현의 지도
보는 바와 같이 17세기 일본의 국가지도는 무라카와 오타니 가문에서 비밀리에 울릉도 독도를 항해하였다고 해서 그 지역이 일본의 영토라는 주장을 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 막부가 정말 두 섬을 “하사’하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지정한 지도가 있다면, 현이나 국가에서 그 입장을 반영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몇 몇 일본 학자들은 두 섬이 17세기에 이들 가문에게 하사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 대한 일본지도는 일본의 영토에 대해서 무엇을 더 말해주는가? 아래에는 일본의 서쪽 해안 현을 나타낸 한자로 표기된 참고지도가 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일본 서쪽을 나타내는 17세기 중반 일본현의 지도를 모두 볼 수 있다. 만약 일본이 진실로 울릉도 독도지역을 관할하였다면 이 지도에는 확실히 포함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것이 없다.
여기서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항해한 것은 영토 주권 속에서 항해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공도정책을 실시하는 동안 비밀리에 막부의 허가를 얻어 울릉도지역의 자원을 채취하러 허가를 얻어서 개인적으로 간 활동임을 알려 준다. 조선의 기록에서는 1614년경에 일본인들의 경계 침범을 항의한 기록이 있다.
처음 일본의 서쪽 지도
아래의 두 지도는 지리적 역사적 참고를 위한 것이다. 오른쪽으로 일본의 고지도는 일본 서해안을 보여준다.(한자표기) 한자표기와 일치하는 일본의 17세기 지방지도가 있다. 오른쪽은 일본 서쪽이 검은 색으로 표시한 일본과 한국의 지도이다.
Japanese 일본의 서해안을 나타내는 지방 지도.
1660년대의 이들 지역지도는 오른쪽으로 일본 Oki에서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는 여향지도이다. 오른쪽에서 Oki의 서쪽에 울릉도와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국가지도와 1667년 Saito Hosen의 Oki에 관한 보고는 Oki가 일본의 서북쪽 끝임을 알리고 있다.
위에는 17세기 중반, 일본 서해안의 지역지도인데 당시에 울릉도와 독도는 이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더 큰 지도를 보려면 클릭하시오.
초기 일본의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기록 – 증거로 본 결론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17세기 두 가문의 항해에 근거한 “효과적인 관리”를 통하여 17세기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지도들을 통하여 볼 때, 거짓임이 드러났다. 일본 막부가 지역의 현이나 국가적으로 볼 때, 그들의 영토가 아닌 땅을 무라카와 등의 가문에게 봉건 영지로 수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 가능성이 있는 설명은 무라카와 오타니 가문은 단순히 항해면허만 받았을 뿐이라는 Hideki Kajimura 등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우리는 막부가 특별한 허가 없이 엄격히 외국으로의 항해나 접촉을 금지하였다. 이런 연례적인 행해는 울릉도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의 의미가 아니다. 사실상, 도해면허증은 일본인들이 다른 나라에 여행할 때 사용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일본인들이 두 섬을 외국 땅 또는 일본에서 별도의 땅으로 본 것을 증명한다.
일본의 17세기 지도는 이 이론을 지지한다. 또한 일본의 기록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항상 Oki섬의 서북쪽에 있고 “한당”으로 표시하였다. 위의 Hoten지도는 한당이 일본과는 별개로 강원도에 속해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영역 밖에 있고 독도는 1905년 일본이 편입하기 전 까지, 일본영토 밖이었다.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한 방식은 1905년 이전에 일본의 이 섬에 대한 관계를 잘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만약 일본이 무라카와의 항해 이후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인식했다면, 독도를 편입할 때, 그들은 “주인없는 땅” 또는 “무주지”라고 선언하지 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비밀스럽고 불법적인 몇 몇 일본어부들의 행동은 일본인 스스로의 눈으로 볼 때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행위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