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페이지는 한국의 고대에 독도지역 존재가 있음을 보여준다. 독도는 리앙쿠르 바위 또는 일본인들은 다케시마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섬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독도에서 한국인의 활동을 보게될 것이다. 먼저, 몇가지 지도를 보면서 독도에 관한 전반적인 고찰을 하여보자.
아래 왼쪽의 지도는 동해(일본해) 전체를 보여주고 있다.울릉도는 독도의 서쪽편이 위치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독도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한국은 울릉도 독도 지역에서 볼 수 있다. 아래 오른쪽의 지도는 울릉도를 보여주고 있다. 청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고대 유믈이 발견되어 발굴된 곳이다.
위 왼쪽은 독도지역 지도이다. 오른쪽은 한국 울릉도이며 푸른 점으로 표시된 곳은 고대 한국인들의 유물이 발견된 곳이다.
“울릉도는 독도 – 다케시마와 어떤 관련성이 있나..?”
울릉도에서 87 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독도는 울릉도와 가장 가까운 섬이다. 날씨가 맑은 날울릉도에서 독도는 눈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많은 역사서에 오랬동안 기록되어 있다. (링크를 보라) 고대 기록과 유믈들은 일본보다 1,000년 전에 앞서 한국이 독도와 관련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좁은 식견을 가진 몇 몇 사람들은 고대 한국인들이 천년동안 독도를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부정한다..
위 왼쪽: 이 이미지는 독도에서 찍은 울릉도 사진이다. 위 오른쪽은 최근 울릉도에서 찍은 독도 사진이다..
역사적인 문서들을 볼 때 한국과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별개로 논의하는 문서기록은 없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를 형제섬으로 인식하였다는 것이 타당한 결론이다. 한국측으로서는 독도가 일본과의 영토경계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일본과는 별개로 생각한였다. .한국으로서는 독도 바깥은 먼 적국 땅이라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독도는 한국의 국경 한계였다. 기록을 볼 때 독도는 한국과 일본에게 마치 “동해(일본해)의 하와이” 같은 곳으로 보여진다.
울릉도는 동해의 중간에서 풍부한 산림자원과 해양자원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울릉도는 독도를 가짐으로 해서 결정적으로 소유권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울릉도가 없었다면 독도는 일본인들에게 탐낼 이유가 없었다. 두개의 황량한 바위로 이루어진 독도는 음료수도 부족하고 나무도 없어서 항해는 5일이 걸리는 힘든 곳이었다.
울릉도의 고고학적인 유물 Part A.
통일 신라시대의 무덤과 고대 고인돌이 발견되다.
고대인류에 대한 고고학적인 연구는 울릉도에서 일본의 한국식민지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평판있는 고고학 연구팀은 일본의 토리 류조 그리고 후지타 료사쿠 교수이다. 잘 알려 진 바와 같이, 토리 류조는 1917년 11월 후반에 사진사를 울릉도로 데리고 가서 현포, 천부동, 남양, 남서리 등의 이야기 자료를 수집하였다.
오른쪽으로, 한국고고학자가 1957년 고분 # 38호를 울릉도 현포리에서 발굴하고있다. (이이지 클릭)울릉도에서의 유물 발굴은 해방후 1957년과 1963년에 국립박물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수 많은 고분들이 도굴되거나 훼손되었다.
조사팀은 섬에서 바른 위치를 찾아 발굴하려고 노력하였다. 무덤은 돌 구조로 매우 잘보이는 땅위에 있었고, 울릉도 무덤은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이조시대의 많은 지도에서는 이 무덤지역을 “石葬”으로 표시한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시험적인 발굴과는 달리, 영남대학교 박물관은 2000년에 현포리에서 상층 열 무덤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으며 섬 무덤의 가장 특수한 위치를 밝혀내었다.
1957년 7월 8일 국립대학 발굴팀(김원용, 윤무병, 임천)이 대구로 향하는 열차를 타고 울릉도 연구를 향해 떠났다. 그들은 대구와 포항을 경유하여 울릉도를 연구하러 떠났다. 이 여행은 7월 12일 부터 3일을 꼬박 걸려서 갈 수 있었다.
3개의 나머지 이미지들(왼쪽)은 울릉도 남서리의 고분이다. 두개의 사진은 울릉도 고분(왼쪽)과 경주의 고분(오른쪽)을 비교한 것이다. 사진을 클릭하시오.
조사팀은 현포, 천부, 남양 그리고 남서리에서 아주 어렵게 고분들을 발굴하였으며, 그 중의 몇개는 상당히 좋은 상태로 남아있었으며 그 위치를 기록하였다.
1963년 6월과 9월, 국립박물관의 김종기씨는 지난번 울릉도 방문에서 완성하지 못한 곳을 방문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방문에서 그는 놀라운 발굴을 하였으며 천부리 1호고분을 발굴하고 측량하였다. 놀랍게도 이 고분은 도굴되지 않았던 것이다.
위 왼쪽: 대표적인 한국 울릉도 매장 지역. 이 고분은 울릉도 남서리에 있는 것이다. 위 오른쪽: 이 사진은 현포리에 있는 #16 고분에 위치한 것이다. 이 사진은 1957년에 찍은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오.
발굴당시 국립박물관 팀은 울릉도에 있는 87개의 고분을 발굴하였다. 대부분의 고분들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668-935 A.D.)
이 발견은 그 위치와 구조를 밝혔다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였다. 이 매장지역에서는 또한 유물과 유품들이 나와 당시의 무덤구조를 밝혀 주었다. 울릉도에서 발견된 모든 고분들은 적석총이었으며 대부분 지상에 축조되었다. 1단계 지상돌을 쌓고 석실이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그들은 흙으로 뚜껑을 덮지 않고 돌로 뚜껑을 덮었다. 울릉도에는 흙이 적기 때문에 돌로 만들었던 것이다.
위 왼쪽: 이 지도는 고대 울릉도 지도처럼 매장지역의 위치를 보여주는 “石葬” 표시를 하고 있다. 위 오른쪽: 울릉도 저동과 남서리 부근 나수전에 있는 고대 한국의 고인돌 무덤.
무덤은 하나의 입구와 돌벽을 양쪽으로 쌓아 평돌을 위에 덮어 구조를 완성하였다. 이 무덤 중의 몇 몇 돌은 10 미터가량 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4 ~ 7 미터 길이에 높이 1 ~ 1.6 미터였다. 시신을 안치한 석실은 긴 장방형이지만 옆부분이 약간 둥글기 때문에 물고기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무덤들은 해안가 언덕 이 또는 산악지대 그리고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해안입구에 있었다.
울릉도 고분과 관련하여 보면, 신라 경주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경주 신라 무덤은 돌로 쌓은 것이지만 무덤으로 안내되는 길이 나있지만 울릉도 무덤은 들어가는 현관만 있고 길은 없으며 흙 대신에 잔돌을 깔았다.
위에 기술한 무덤은 6세기 통일 신라시대(668-935 A.D.) 이전에 독도 근처에서 한국인들의 활동을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울릉도에서의 고대 고고학적인 증거는 6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울릉도에서 돌멘(고인돌)이 발견되고 있으며 돌멘은 cromlech, anta, Hunengrab, Hunebed, quoit, 그리고 portal dolmen라고 불리는 큰 단일 석실을 무덤으로 만들고수평으로 놓은 큰 돌을 3-4개의 수직돌로 받침대를 만들어 둔 것이다.(표).
한국 울릉도에서 고고학적인 발견, Part B
통일신라시대 청동기와 토기 무덤부장품
토기, 옥, 도금 청동기, 그리고 철제품들이 발굴되었다. 단지는 고고학적으로 발견되는 유물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다. 굽높은 병, 무늬 병 그리고 사각 그릇들은 회청색이다. 이 그릇은 한국어로 경질토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7-10세기 한국본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 무덤이 통일신라시대 것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위 이미지들은 통일신라시대 울릉도에서 발견된 토기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국인들이 울릉도를 지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부장품들은 천부리에서 발견된 것이다.(두번 클릭하시오)
더 많은 신라시대 초기들이 발견되었다. 오른쪽 짧은 굽 그릇은 신라시대 이전의 것으로 추측된다. 더 큰 이미지를 보려면 두번 클릭하시오.
이 부장품들로 보아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이 지역에 항해하기 이전 1,000년 전부터 본토에서 울릉도로 자유롭게 왕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짧은 목 잔과 그릇은 6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 왼쪽: 통일신라시대 물병이 천부리에서 출토되었다.위 오른쪽, 적갈색과 다양한 색의 기법이 토기에 나타난다는 것은 한국의 다른 지역 또는 울릉도 다른 지역에서 만들어졌음을 말해 준다. 이것은 연질토기라고 부른다. 나무조각으로 토기 안밖을 다져서 단단하게 만드는 기법이 활용되었고 표면에 홈이 패인것을 볼 수 있다. 회청색 토기가 통일신라시대의 지층에서 발견되었다.
…”신라가 3국을 통일 하였을 때, 신라는 지방행정제도를 바꾸어 보다 효과적인 영토관리를 위하여 귀족을 지역으로 파견하고, (신라의 문화는 경주에 집중되었다.) 한반도 전역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문화는 이 지역의 문화와 혼합되어 독자적인 특성을 나타내 주고 있다. 울릉도는 이러한 역사적인 법칙을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무덤과 기타 문화에서 특수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울릉도에서 발견된 회청색 토기는 신라토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흙의 질과 색깔이 각기 다르다. 이 토기들은 신라의 토기와는 다르고 따라서 경주 외의 한반도 지역에서 왔거나 아니면 울릉도 자체에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
위 왼쪽: 통일신라시대 왕관의 부스러기, 귀걸이와 요령이다. 위 오른쪽: 이 그림은 울릉도에서 발견된 금동 파편들이다.
한반도 본토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왕관 공예품들이 울릉도에서 발견되었다. (오른쪽) 몇 조각만 남았지만 신라의 부서진 왕관과 흡사하다. 울릉도의 신라왕관은 한반도 본토의 충청북도 단양에서 발굴된 것, 그리고 동해시 추암동에서 발굴된 것과 비교된다. 섬이라는 울릉도 지리를 감안할 때, 도금청동왕관은 통일신라시대에 울릉도가 한반도 왕국의 지배를 받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이 모든 고고학적인 공예품들을 볼때, 신라시대에 한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지배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울릉도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유물 Part C
기타 울릉도 발굴 공예품
위 왼쪽: 아름답고 투박한 기도하는 울릉도 인물상. 위 오른쪽: 울릉군 주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물병과 여러 그릇들(두번 클릭하시오).
위 왼쪽: 통일 신라시대의 단순한 색깔의 목걸이. 이 공예품은 북면 천보리 고분#1 에서 발굴된 것이다. 위 오른쪽: 종과 금동 공예품.
위 사진은 두개의 절구공이와 멧돌인데 멧돌은 콩 반죽이나 쌀가루를 만들 때 쓰인다.
울릉도에서 발굴된 공예품, Part D
한국의 신라에 병합된 우산국
통일신라에 병합되기 전에 울릉도에 관한 간단한 역사는 “삼국사기”라고 하는 한국역사서에 나타난다. 이 1145 A.D에 기록된 이 역사서에는 울릉도가 힘으로 신라에 병합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지증왕) 13년 5월(512 A.D.), 우산국이 항복하고 매년 지방공물을 바쳤다. 우산국은 명주[현재 강릉]에 있는 섬이다. 이섬은 울릉도라고도 불렀다. 면적은 사방 100리이다. 이 땅은 정복하기에 매우 힘들다 …”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최고 행정관으로 왔을 때 말하기를, “울릉도 사람들은 무지하고 거칠어서 힘으로 복종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꽤를 써서 정복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많은 나무 사자모양을 만들어서 전함에 싣고 울릉도로 갔다. 해안에 도착하자 그는 거짓으로 말하기를, “만약 너희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놓아 너희들을 짓밟아 죽이게 하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겁에 질려 즉시 항복했다…”
이 문서는 적어도 6세기에는 우산국의 정치지도급이 사실상 존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우산국은 신라가 병합하기 이전에 자체적으로 통치되는 국가였던 것이다. 우리가 우산국 병합에서 사용한 신라의 전략을 볼 때, 우산국의 사람들이 얼마나 탄력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야만적인 힘을 사용하는 대신에 울릉도 사람들의 허를 찌르는 전략으로 사람들을 항복하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울릉도 출토 고대 공예품들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이전에 한국인들이 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왜 일본은 독도를 가질 수 없는가 제 3 부 – 결론
한국의 독도 다케시마의 옛날 명칭
의심할 여지없이 고대 한국인들이 먼저 울릉도에 도착하여 정착하고 정부는 그 지역을 다스렸다. 한국인의 활동은 간단하지가 않았으며 우연히 울릉도에 도착하거나 계절을 이용하여 항해하기도 했다. 울릉도는 일본어부들이 잠시 머물기 전에 벌써 천년이 넘도록 한국인의 영구 정착자들로 주거가 형성되었다. 신라가 강제적으로 울릉도(우산국)를 병합하였을때, 주민들은 한국정부에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신라행정부가 이시대에 관리를 파견되어 이 공물을 거두고 정기적으로 울릉도-독도지역으로 항해하였음을 말한다.
위 왼쪽은 울릉도 섬에서 본 독도 이미지이다. 위 오른쪽은 독도에서 바라 본 울릉도이다. (더 큰 사진으로 보시려면 사진을 클릭하시오)
독도-다케시마에 관한 단순한 사실은 울릉도 언덕에서는 일찌기 한국인들이 독도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의 독도연구소는 독도가 한달에 3번 정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1618년 일본인들이 독도에 도착하기 전에 한국의 울릉도 주민들이 독도에 갈 수 있는 기회가 36,000번 이상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도착하기 900년 전에 울릉도에 사는 고대 한국인들은 동쪽을 바라보고 독도가 있으며 그것이 자기들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땅을 볼 수 있는 곳까지가 자기의 영토라고 간주하였다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고대 한국인들이 적어도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이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은 자연스런 논리다. 한국의 이 지역에서의 평화는 일본 해적들이 15세기 초에 들어오기 시작한 때부터 어렵게 되었다. 그후 5세기가 지난 후 , 서쪽을 향한 일본의 집요한 욕망은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