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과 독도-다케시마 2

일본 제국의 독도 편입의 실제 동기
일본 외무성은 1905년 독도 편입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감추고자 한다!!
러시아 발틱(Baltic) 함대의 믿을 수 없는 항해
1904년 10월 15일, 제2 태평양함대(이전의 발틱함대)는 발틱해를 떠나 최종적으로 여순항으로 향하였고, 1905년 6월 경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석탄을 에너지로 하는 이 전함은 추가적인 감판 시설이 없이, 18,000 마일을 항해하기는 무리하였다. 양쪽 엔진은 오랜 기간 동안 작동하여 속도가 느려졌고, 고장나기 쉬웠다. 증기 보일러는 열대지방을 통과하면서, 청소를 자주해야 했고, 러시아 군인들에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지옥같은 일이었다.

거의 초인적인 힘으로 유래없이 발틱해에서 지구를 한바퀴 도는 18,000 마일의 항해 끝에, Zinovi Petrovitch Rozhdestvenski 부제독은 1905년 5월 남중국해를 지나고 있었다. 제 3 태평양함대는 Nikolai Nebogatov 후방제독의 지휘아래, Rozhdestvenski의 함대와 함께 그달에 만나기로 되었다. 여순항이 일본군이 손에 들어가자. 러시아해군의 갈 곳은 Vladivostok 밖에 없었다.

좁은 해로에서 Rozhdestvenski 제독이 택할 수 있는 가능한 길은 3 가지뿐이었다. 먼저 두 가지는 일본 본토의 북쪽 La Perouse와 Tsugaru를 통과하는 것이다.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일본의 동해를 통과하는 것인데, 석탄 소모가 더 많이 필요하고, 그 동안에 공격받을 위험이 더 크다. 세 번째 대안은 대마도 해협을 통과하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이 통제하는 심장부를 통과하는 것이다. 함대의 상태와 Vladivostok까지 가는 동안 석탄 공급의 필요성을 볼 때, Rozhdestvenski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대마도 해협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의 이미지는 매일매일 러시아 발틱함대가 지나가는 길을 점으로 표시하고 있다. 통로는 초록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자로 표시된 매일의 위치를 보라. 독도 편입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Komura Jutaro는 힘든 항해를 하는 러시아 함대의 위치를 정기적으로 전신으로 받았다.
1905년 5월 27일 – 대마도 해협 전투
1905년 5월 27일 오후 함대가 집결하다. 처음 포문을 연 전함은 Rozhestvensky 제독의 기함 Knyaz Suvorov였다. 3분 후, Togo(오른쪽) 함장의 깃발아래, 전함 Mikasa가 불을 뿜었다. 첫 40분 동안의 전투에서 일본은 전함 Knyaz Suvorov 그리고 Oslyabya에게 고성능 포탄을 퍼부었고, Oslyabya는 Vladimir Ber함장과 많은 선원들과 함께 침몰하였다.

Rozhestvensky 제독은 부상당하고, 함대의 지휘가 곤란해졌다. 전함 Alexander III 그리고Borodino의 함장, Alexander, Borodino 그리고 다른 전함들이 일본함대의 측면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16:00시에 함장 Togo는 안개와 연기 속으로 러시아 함대를 놓쳤다.

북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Togo 함장의 함대에게 다시 포착당했다. 전투를 포기하기 직전 러시아는 Emperor Alexander III 그리고 Borodino호를 잃고, 거의 동시에 Knyaz Suvorov가 일본의 어뢰공격을 받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저녁 늦게, Emperor Nicholas I함에 타고 있던, 후방사령관 Nebogatov가 함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Togo 제독은 사격을 멈추라고 지시하고, 보다 근접하여 러시아 함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전함 Sysoy Veliky는 순양함 함장 Nakhimov 그리고 Vladimir Monomakh와 함께 폭사하였다.다른 3척의 전함은 대마도로 향하였지만, 너무 심하게 피해를 입어 5월 28일 선원들과 함께 도망하였다. Navarin(왼쪽)호는 기뢰에 맞아 침몰하였다.

Iosif Matusevich 함장의 지휘아래, 러시아 구축함 Bezuprechny는 모두 전사한 가운데 격침되었다. 피해를 입은 순양함 Svetlana은 몇 척의 일본 순양함과 싸웠다. 모든 포탄을 퍼붓고, Svetlana 함은 배의 운항을 멈추었다. 일본은 Ushakov 제독에게 항복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함포로서 대응했다. 한 시간이 지나서, Ushakov 제독은 St. Andrew의 기수 아래에서 침몰하였다.

두 척의 일본 구축전함과의 전투에서 러시아 구축함 Gronky는 함장 Georgy Kern의 지휘 속에서 깃발을 나부끼며 침몰하였다. 마지막까지 불을 뿜던 순양함은 Dmitry Donskoy였다. 5월 27일 아침까지, 6척의 일본 순양함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5월 28일 심하게 피해를 입은 함대는, 전사한 Ivan Lebedev함장을 대신한 지휘관 Konstantin Blokhin의 명령아래,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위 왼쪽이 예술가의 작품 표현은 러시아 기함 Knyaz Suvorov가 대마도 전투에서 직접 공격을 받는 장면이다. Rozhestvensky 제독은 포탄 파편에 어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는 구축함으로 이송되었으나 결국 생포되었다. Rozhestvensky 제독은 일본 해군에 감금당하였다.

위 오른쪽 이미지에서 부상당한 Dmitiri Donskoi 호의 함장 Lebedev가 울릉도 섬에서 항복한다. 그의 선원들은 배가 점령당하기 전에 탈출하고, 배는 다른 배들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의해서 재사용된다.

위 왼쪽: 위의 Svetlana호는 치열하게 싸우면서 항복하기를 거부했다. 빗발같이 퍼붙는 포탄 속에서 선원들은 배에서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함장은 사망하고, 사령관은 중상을 입고 배는 점점 가라앉으면서 선원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위 오른쪽: Dimitri Donskoi의 사진.
러시아 함대의 포수들은 거의 24시간 포를 겨누었고, 6시간 동안 역사상 가장 치열한 해전을 치루었다. Togo제독은 다른 한 편으로 울릉도 북쪽에서 다른 함대들과 만나면서 15노트로 북쪽을 항해하며 선원들을 쉴 수 있었다.

Togo 제독은 해가 뜨는 울릉도 동남쪽 30마일지점에서 밤을 보냈다. 그때, 도고제독은 남쪽 60마일 지점에서 북쪽으로 가는 러시아 함대가 발견되었다는 전문을 받는다.

후방 제독 Nebogatov는 느리게 운항하는 자기 함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Togo 제독의 함대를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시도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2000명의 부하들이 도망갈 수 있기를 바랐다. Nebogatov 제독은 부하들의 의미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명령을 할 수 없었다.

위 왼쪽: 대마도 전투의 역사적인 실제 지도 그림이다. 이 지도는 참고로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위 오른쪽: 이 지도는 러시아 함대의 통로와 멸망장소를 보여준다. 아래의 오른쪽 이야기는 색깔을 입힌 그림이다. (확대하려면 클릭하시오)
Nebogatov는 독도 남서쪽해상에서 국제 항복 표시 깃발 XGH를 올리고 있다. Togo 제독은 그 깃발이 속임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함대에게 사격을 멈추고, 장교들을 보내서 포로들을 잡고 승리를 거두었다.

대마도 참사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5,045 명이 러시아 수병이 사망하고, 6,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의 승리 비용은 3척의 구축함과 699 명의 장교 그리고 선원들이 희생당했다. 5월 27-28일의 전투에서, Nicholas II세 정부는 평화협상에 서명하였다. 1905년 8월 23일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은 광동반도, 여순항, 그리고 북위 50도 선의 사하린을 얻었다.

위의 사진은 후방 사령관 이 독도 남쪽에서 항복한 후에 찍은 사진이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일본인들이 뉴스를 듣고 난 후 독도(竹島)를 잘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된다. Nikolai I (그는 생포를 피하기 위해서 선원들과 함께 도망하였다).
대마도 전투 이후
일본은 1905년 11월 9일 Liancourt Rocks (Dokdo) ~ Matsue 간 두 번째 해저 전선을 가설하게 된다
러일 전쟁은 근대의 첫 번째 세계적인 규모의 큰 전쟁이었으며, 아시아 국가가 유럽대국을 패배시킨 첫 전쟁이었다.

일본의 승리는 아시아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고, 이 지역에서 신민주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러시아의 군사적 패배는 짜르 황제정부의 취약성을 드러내었고, 1905년 혁명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 육군과 해구의 완전한 패배로, 짜르황제는 평화를 제안하였다. 미국 대통령 Theodore Roosevelt는 Portsmouth 회담을 주선하지만(August 23, 1905), 일본은 평화를 잃었고,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서양 국가들의 외교를 믿지 않았다.

일본 해군은 해전을 치룬 이후 1905년 5월 30일 계획을 수립하고, 6월 13일 전함Hashitade를 독도로 보내어 상세한 측량을 하도록 하였다. 해군은 이에 따라 6월 24일,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동해에 전반적인 시설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이 계획은 (1) 울릉도 북쪽에 대규모 감시초소를 설치하고(9명이 초병이 근무한다), 무선통신소를 세운다. (2) 독도에 장기적으로 유지되는 감시초소를 세운다.(4명이 배치된다), (3) 두 섬의 통신소간에는 해저전선으로 연결하여 Oki 섬의 통신소와 연결한다. 이것은 국가의 영역을 넘는 불법적인 군사 시설이었다.
울릉도에 새로운 군사시설의 설치는 July 14, 1905년 7월 14일에 시작되었고, 8월 16일 완성되었으며, 독도 시설은 6월 25일 시작하여 8월 19일 완성되었다. 독도와 Oki를 해저전선으로 연결하려는 처음의 계획은 1905년 9월 러시아와의 평화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변경되었고, 그 대신 전선은 독도와 Matsue 사이에 연결되었다.

이 작업은 1905년 10월에 시작되어 울릉도에서 독도를 거쳐 Matsue간의 연결은 그해 11월 9일에 완성되었다. 일본 해군 장군. 1905년, 한국본토 죽변과 울릉도, 독도, 그리고 Matsue 간의 통신선이 완성되었다.

왼쪽의 지도는 동해(Sea of Japan) 지역에서 일본의 군사화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독도 ~ Matsue 간 해저 전선은 일본이 이 지역에서 모든 활동을 통제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것이었다. 초록색 선은 일본 해군의 첫 번째 전선의 단계를 나타내고, 그 설계는 대마도 전투 이후 급히 수립되었다.

간략히 말해서, 일본정부로서는 Takeshima/Dokdo는 단순한 군사적 가치 이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한국의 여러 곳에서의 군사적 점령과 무관하지 않다.

이 내용 위(왼쪽)에는 일본 아시아지역 역사기록 센터의 지도이다. 이것은 1905년 10월과 11월 사이를 나타내고 있다. 붉은 글씨는 원래 지도에서 지리적 위치를 강조하기 위하여 추가된 것이다. 이 지도는 이미지 파일 크기를 줄이기 위하여 약간 잘라내었다. 위 오른쪽 사진은 이 전선망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를 보여준다. 이 전선은 명확히, 한국국경 해안 지역과 서북쪽 2,000km 떨어진 Vladivostok 항구의 해군활동을 감시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독도의 군사화과정을 보게 된다. 해저 통신선은 일본 Matsue, ~Dokdo~울릉도 그리고 북쪽으로 원산에 이어진다. 이 선들은 지금 북한 지역에 속해있는 한반도 북쪽 지역의 일본군사시설과 연결된다.(고해상도를 보려면 클릭하시오)

1904-1905년 한국에서의 러-일 전쟁 활동시간표
February 8, 1904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의 인천항과 중국의 여순항을 공격하여 러시아 군함을 침몰시킨다. 일본군이 서울로 진격하다.
February 16, 1904 904 년 2월 16일 일본은 힘으로 한국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12사단이 인천에 상륙한다. 일본군은 북쪽으로 압록강으로 올라가면서 제1 군단을 조직한다.
February 23, 1904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국을 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합법적”으로 서명토록하고, 한국을 군사적인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Late March 1904 1904년 3월 말 주한일본공사 Hayashi의 보고서에는 일본이 내각을 조직하여 재정개혁, 경제적 양보 그리고 영구적인 군대 기지주둔을 건의한다.
April 26, 1904 1904년 4월 26일, 러시아 해군이 일본 수송선을 격침시킨 뒤, 모든 일본 군인들은 항복을 택하는 대신 모두 배와 함께 침몰한다.
May 19, 1904 1904년 5월 19일 한국은 러시아와 맺은 모든 조약을 취소하고, 관계를 단절한다.
May 31, 1904 1904년 5월 31일 일본 내각은 한국의 외교, 군사, 경찰, 재정, 통신, 그리고 운송에 대한 권한을 접수할 계획을 세운다.-이것은 일본이 이주할 사전 계획을 마련하고, 자원을 착취할 계획이다.
June 15, 1904 1904년 6월 15일, 러시아 전함이 일본 수송선 2척을 격침시키고, 일본은 2000명의 군사와 총포를 잃는다.
Early August 1904 1904년 8월 초, 한국 궁정은 재정과 외교분야에서 친일 자문관을 임명하는데 동의한다. 한국의 화폐는 개혁되고, 일본이 재정주도권을 가지게 된다.
August 14, 1904 1904년 8월 14일, 일본 해군은 울산 지역에서 러시아 해군을 격퇴한다.
September 25, 1904 1904년 9월 25일, 일본 해군은 울릉도에 해군기지를 마련하고 일본 Sasebo 간의 해저 전신망을 완성한다.
November 20, 1904 1904 11월 20일, 일본군 전함 대마도가 독도를 조사하고 독도는 동도 쪽에 해저전신케이블을 설치하고 감시초소를 만들기에 적절하다는 지형도를 확정한다.
January 5, 1905 1905년 1월 5일, 전함 대마도호의 독도 측량보고서가 일본 해군수로국장 Kimotsuki에게 제출된다.
January 28, 1905 1905년 1월 28일, 비밀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하고 이름을 Takeshima라고 하기로 결정하다.
February 20, 1905 1905년 2월 20일, Mukden(Shenyang) 전투가 시작되고. 이제까지 싸운 육지전투 중에서 가장 큰 전투로 500,000 만명 이상의 러시아군과 일본군이 전투에 참가하고, 150,000 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였다.
February 22, 1905 1905년 2월 22일, 시마네 현이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키다.
April 1905 1905년 4월, 일본 내각은 가까운 장래에 한국을 보호조치하기로 결정하다.
May 27~29, 1905 1905년 5월 27~29, 대마도 전투가 동해에서 벌어지다. 이제까지 벌어진 가장 큰 해전으로 당시 5,000명 이상이 러시아해군이 전사하고, 6,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은 3척의 구축함과, 600명의 장교아 사병을 잃었다. 러시아해군은 패배하고 일본이 세계의 열강이 되다.
May 30, 1905 1905년 5월 30일, 일본 해군이 울릉도와 독도에 군사초소와 해저케이블 망이 설치될 계획을 세우다.
June 8, 1905 1905년 6월 8일, 미국이 공식적으로 일본가 러시아의 평화회의를 주선하고 6월 12일 양국이 공식적으로 협상을 수락하다.
June 24, 1905 1905년 6월 24일, 일본 전함 Hashitade가 독도를 조사하다.
July 14, 1905 1905년 7월 14일, 일본해군이 울릉도와 독도에 감시초소 및 해저 전신케이블 설치를 시작하다.
July 29, 1905 1905년 7월 29일, Taft-Katsura 비밀 협약이 맺어지고,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대신에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합의하다.
August 12, 1905 1905년 8월 12일, 영국-일본 동맹이 갱신되어 양 측 중에 어는 한 국가가 침략을 당하는 경우에는 상호 협력하기로 하되, 인도에도 적용되고, 영국은 일본이 한국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일본은 인도와 버마에서 영국지배권을 저해하지 않는다고 합의하다.
September 5, 1905 1905년 9월 5일, 러일 전쟁에서 포츠머스 회담이 종결되다.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요동반도, 남부 사하린을 지배하고, 그리고 남만주를 철도부설권을 얻는다.
November 9, 1905 1905년 11월 9일, 일본 해군은 울릉도와 독도의 감시초소와 해저 통신망을 완성하다.
November 17, 1905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한국에게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서명케하고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을 체결한다.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결론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과 러일전쟁은 분리할 수 없다..”
일본외무성은 그들의 웹사이트에서 시마네 현이 단순히 독도를 편입하면서 그 획득이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러-일 전쟁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1904~1905년의 사건을 잘 살펴보면, 러일전쟁은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기 2일 전에 세계역사상 가장 큰 육상전투가 중국 묵단(선양)에서 벌어진다. 일본 제국해군은 1905년 2월 마다가스카르를 돌아 동해로 접근해오는 러시아 Baltic 함대를 맞이한다. 이러한 Baltic 함대와 일본 해군의 대결로 동해의 울릉도와 독도 근해에서 세계역사상 가장 큰 해전을 치르게 된다. 일본 외무성은 당시에 한국 문제에 개입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영토문제는 개별적으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완전히 조사되어야 한다. 독도 – Takeshima의 경우, “역사적”이란 단어는 시마네 현의 독도 편입을 가져오는 직접적인 과정을 포함시켜야 하며, 1905년 한-일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포함시켜야 한다….” (Kazuo Hori, Professor Kyoto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