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900년 독도관련 칙령 41호

한국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을 통하여 독도를 울릉도에 편입시켰다.
1882에 조선 정부가 일본이 울릉도에 침입하여 나무(링크)를 베는 일에 대해서 일본 외무성에 강한 항의를 제출하고, 즉시, 이런 불법행위를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1883년 3월에, 정부는 김옥균을 이 지역의 개발을 위한 관리자에 임명하고, 이제까지 공도정책을 포기하고 울릉도 지역을 개발하고, 사람의 거주를 시작했다.

일본의 침략과 벌채가 1897년 10월에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므로, 한국의 정부는유몽정(柳夢井)을 선봉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하였고, 거기서 그는 대략 70명의 일본의 침입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섬의 당국은 법률을 실시하기 위해서 한 명의 군대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위쪽: 독도가 울도(鬱島)郡에 병합된 조선의 勅令 41號의 이미지.
한국정부는 1900년 10월 25일, 제국 칙령 41호를 공포하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Ulleungdo 울도의 이름을 울릉군으로 바꾸고, 군수를 최고 책임자로 격을 올린다. 조례의 제11조는, 태하동을 군사무소라고 칭하고, 울릉군, 죽도와 석도 전체에 걸쳐서 있는 울도군 치안 재판사의 관할권을 정했다. 죽도는 울릉도로부터 대략 2.2 km 떨어진 죽서도를 말하고 그리고, 석도는 독도섬을 칭한다.
“어떻게, 석도라는 이름은 독도섬을 나타내게 되었는가..?”
1882년에는, 고종은, 특별한 조사자를 섬의 개발에 대비하여 이규원이라는 사람을 울릉도에 임명하였다. 그의 임무는, 섬의 지도를 만들고, 특산물을 찾아내고, 일본인에 불법 침입하여 불법한 벌채를 조사하고, 주민의 상세한 국세조사를 하는 것이 필요했다.

울릉도의 실제적 인구통계를 조사한 후에, 그는 거주자 중 140명이 한국인이었음을 알았다. 그들 중 82% 115명은, 호남(전라도)의 여러 지방 출신이었다. 14명의 거주자(10%)는 강원도 출신이었다. 그들 중 10명(7%)은 경상도에서 왔으며, 경기도에서는 1명이 왔다. 일본인은 78명이었다.

한국어에서, 바위에 대한 말은, “돌”이다. 돌의 한자 발음은 “석”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부분의 거주자(82%)는 전라도 출신 사람들이었다. “돌”은 그들의 방언으로는 흔히 “Dok”으로 흔히 발음한다. 이름 “석도”와 “독도”를 울릉도 사람들은 바꾸어 흔히 말한다고 한다. 아래에는, 지금까지도 전라남도의 몇 몇 지방에서 한국인들이 “석”이라는 글자를 “Dok”으로 실제 발음하고 있는 실제의 사례를 보여주는 도표이다.

「Dok」으로 실제 발음하고 있는 사례

① Dok-gol 石洞 : 보성군 문덕면, 운포리
② Dok-go 마을 石谷 : 보성군 문덕면, 운포리
③Doldokgeori 마을 擧石里: 보성군 노동면, 거석리
④Doksalmae 마을 石山里: 신안군 안좌면, 향목리
⑤Doksan 마을 石山洞 : 신안군 지도면, 선도리
⑥ Dokmae 石山里 : 무안군 삼향면, 웅산리
⑦ Doksalmae 石山 : 신안군 안좌면,대우리
⑧ Dolgogae 石峴 : 완도군 고금면, 가요리 언덕
⑨ Dokbaegi 石峙洞 : 강진군 도암면, 용화리
⑩ Dokbaegi 石田平 : 보성군 화천면. 군풍리, 평야
⑪ Dokteumi 石間洞 : 강진군 군동면, 석교리
⑫ Dokdari 石橋里 : 해남면 문내면, 석교리 다리
⑬ Dokdarigol 石橋里 : 진도군 임해면, 석교리
石이라는 글자가 “dok”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 직후, 그 소리는 한국의 표준적인 한자 “獨”으로 표기된다. 이 글자의 활용과 독도의 이름은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기 전인 1904년 일본전함 니타카호의 항해일지와 심흥택의 일본의 독도편입을 항의하는 문서에서 기록된다.

오른쪽 이미지는 옛날 한국 의 남쪽 지도에서 보는 지도이다. 여기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같은 글자가 한국해안의 바위 섬에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지도는 1682년에 그린 것이며 한국사람들이 어떻게 “Seok-do-석도” 또는 “바위섬”으로 기록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독도섬은 흔히, “바위로 된 섬” 또는 “돌섬-石島”으로 1900년대에 몇 몇개 기록되고 있다.

독도섬은 석도 (岩島) 또는 “바위섬”으로 기록되었다.
나카이 요자브로의 일기
역사적인 문서를 연구해보면,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은 독도를 “바위 섬” 岩島라고 기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의: 한자글자 岩은 돌(石)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rock”을 뜻한다. 이 기록들은 두개 모두 일본측의 나카이 요자브로의 기록에 나오는 것으로 라앙쿠르 암초를 임대하고자할 때 나타나고, 또한 일본 전함 니타카호의 항해일지에도 나온다.
“..隠岐列島ノ西八十五浬、朝鮮鬱陵島ノ東南五十五浬ノ絶海二俗二リャンコ島ト称スル無人島有之候. 周囲各約十五町ヲ有スル甲乙二ヶノ岩島中央二対立シテ一ノ海峡ヲナシ, 大小数十ノ岩礁点々散布シテ之ヲ囲繞セリ. 中央ノ二島ハ四面断岩絶壁ニシテ高く屹立セリ. 其頂上ニハ僅二土壌ヲ冠リ雑草之二生ズルノミ.

本島ハ如斯絶海二屹立スル最爾タル岩島二過ギザレバ, 従来人ノ顧ルモナク全ク放委シ有之候. 然ル処私儀鬱陵島往復ノ途次会本島二寄泊シ, 海驢ノ生息スルコト夥シキヲ見テ空シク放委シ置ノ如何ニモ遺憾二堪ヘザルヨリ爾来種々苦慮計画シ, 兪明治三十六年二至リ断然意ヲ決シテ資本ヲ投ジ漁舎ヲ構へ人夫ヲ移シ漁具ヲ備ヘテ先ヅ海驢猟二着手致候.

“..오키 서쪽으로 85리 떨어진 곳, 그리고 조선의 울릉도로부터 55리 떨어진 곳에 사람이 살지 않는 “Ryanko-to”가 있다. 이것은 두개의 바위 섬이며, 바위 섬 A와 B(甲乙)를 가리키며, 각각은 둘레가 15조로 된다. 두개의 바위섬은 서로 마주보고, 그 사이에 통로가 있어 40-50 reef 걸음이 된다. 두 개의 중심 바위섬은 가파른 절벽으로 4면이 둘러싸이고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위에는 토지가 거의 없고 갈대만 있다 전체 섬에는 나무가 없다…”

“..이 섬은 단지 바위 섬이며 바다 가운데서 하늘높이 솟아있고,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사람 손이 닿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울릉도에서 그 섬에 갈때마다 상륙하여 많은 강치가 살고 있음을 보았다. 나는 사람이 버려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여러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다..”

일본 전함 니타카호의 항해일지
“..リアンクルド岩は韓人は独島と書き、我が国の漁夫はリャンコ島と呼んでいる。添付した略図で分かるように、ふたつの岩島で西島の高さは約400尺で傾斜がきつく登るのに難しそうだが、東島は比較的に低く雑草が生え、頂上には平坦な所があり、二、三つの小屋を建てられそうだ.”
“..다음은 울릉도에 있는 동안 실제로 관찰한 사람의 리앙쿠르(독도)에 관한 내용이다. 리앙쿠르 바위를 독도라고 부르는데, 일본사람들은 량코도라고 짧게 부른다. 부속 서류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 섬은 두 개의 바위섬으로 되어 있다. 서쪽 바위는 높이가 약 400 feet이고 너무 경사가 심하여 올라갈 수가 없다…”

위 이미지: 두 개의 독도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岩島” 또는 바위로서 한국의 1900년 칙령 41호로 언급한 것과 같다.
“石島”는 울릉도 가까운 옆의 다른 섬일수가 있는가?
물론, 많은 일본인들은 칙령 41호에서 언급한 석도가 독도는 아니고 울릉도 옆의 바위섬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서에 포함될 수 있는 큰 섬은 몇 개에 불과하다. 울릉도 북쪽 관음도(도항)가 일본은들은 독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관음도가 독도가 될 수 없다.
관음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위가 솟아나온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관음도는 울릉도와 1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바위는 울릉도 해변과 너무나 가까이 있으며, 크기가 너무 작아서 울도관할의 영역으로 언급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다른 주의할만한 섬은 울릉도 주면의 공암인데 이것은 칙령 41호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규원의 지도에는 관음도가 다른 이웃 바위섬만큼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1880년 일본 전함 아마기호가 울릉도를 측량한 지도를 보면, 관음도는 섬이 아니라, 본섬의 연장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 이규원의 울릉도 측량 지도에는 죽도 섬이 “竹島” 라고 표기되어 있고 관음도는 도항(島項) 또는 바위 목이라고 표기되었지만, 석도(石島)라고 표기하지는 않았다.

위 왼쪽: 이 관음도 이미지는 울릉도의 연장으로서 바위 암초를 나타낸 것이지 섬으로 표기한 것이 아니다. 위 오른쪽: 울릉도와 관음도 사이의 좁은 해로는, 왜 관음도가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생각되는지를 보여준다.

위 오른쪽: 1883년 부터 일본인들의 울릉도 지도는 죽도를 “竹島”라고 표시하고 관음도를 도항(島項) 또는 섬목이라고 표시하였고 관음곶(觀音埼)이라고 표시하였다. 관음도를 “石島”라고 표기한 것은 없다.
단지, 가능한 설명이 남아있다면, 勅令 41호의 石島는 독도이다.
1900년대의 역사적인 기록과 지도는 한국인들이 오늘날의 관음도를 표시하기 위해서도항이라는글자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초의 기록은 관음도가 방패도(Bang-Pae Do)라고 불리웠음을 볼 수 있다. (링크를 보시오). 20세기 초에 일본인들은 이 지역을 도항, 관음도 또는 관음곶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관음도를 석도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리는 독도를 석도라고 같은 명칭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이유는 1904년 일본 니타카호의 항해일지에도 그렇게 나오기때문이다 (링크를 보시오) 석도라는 명칭은 1906년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 사실을 항의하기 위해서 쓴 내용에도 나오기 때문이다. (링크를 보시오) 따라서 석도가 전라남도의 방언으로 독도라고 불렀고 글자로 독도를 표기한데서 나오는 혼란으로 보는 한국측의 설명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다. 이런 입장은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잘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