鬱陵島搜討, 間二年, 使邊將輪回擧行, 已有定式, 故搜討官越松萬戶韓昌國處, 發關分付矣。 該萬戶牒呈: “四月二十一日, 幸得順風, 糧饌雜物分, 載四隻船, 與倭學李福祥及上下員役、格軍八十名, 同日未時量, 到于大洋中, 則酉時, 北風猝起, 雲霧四塞, 驟雨霹靂, 一時齊發, 四船各自分散, 莫知所向。 萬戶收拾精神, 戎服禱海, 多散糧米, 以餽海神後, 使格軍輩, 擧火應之, 則二隻船擧火而應, 一隻船漠然無火矣。 二十二日寅時, 怒濤漸息, 只見遠海之中, 二隻船帆自南而來。 格軍輩擧手指東曰: ‘彼雲霧中隱隱如雲者, 疑是島中上峰也。’ 萬戶詳細遠望, 則果是島形也。 親自擊, 激勵格軍, 卽爲到泊於島之西面黃土丘尾津。 登山看審, 則自谷至中峰三十餘里, 而山形重疊, 谷水成川, 其中有可作水田六十餘石下種之地。 谷則狹窄, 有瀑布, 而左爲黃土丘尾窟, 右爲屛風石。 其上又有香木亭, 故斫取香木, 而以間年斫取之故, 漸就稀少。 二十四日到桶丘尾津, 則谷形如桶, 前有一巖在海中, 與島相距可爲五十步, 而高近數十丈, 周回皆是絶壁。 谷口巖石層層, 僅僅攀登而見之, 則山高谷深, 樹木參天, 雜草茂密, 通涉無路。 二十五日到長作地浦, 谷口果有竹田, 非但稀踈, 擧皆體小。 其中擇其稍大者斫取後, 仍向東南楮田洞, 則自洞口至中峰爲數十里許, 而洞裏廣闊基址, 顯有三處, 可作水田數十石下種之地。 前有三島, 在北曰防牌島, 在中曰竹島, 在東曰瓮島。 三島相距, 不過百餘步, 島之周回, 各爲數十把, 險巖嵂, 難以登覽, 仍爲止宿。 二十六日轉向可支島, 四五箇可支魚, 驚駭躍出, 形若水牛。 砲手齊放, 捉得二首, 而丘尾津山形, 最爲奇異, 入谷數里, 則昔日人家遺址, 宛然尙存。 左右山谷, 甚爲幽深, 難於登陟。 仍遍看竹巖、帿布巖、孔巖、錐山等諸處, 行到桶丘尾, 禱山祭海, 待風留住。 蓋島周回, 摠爲論之, 則南北七八十里許, 東西五六十里許。 環海則皆是層巖絶壁, 四方山谷, 則間有昔日人居之土址, 而田土可墾處, 合爲數百石下種之地。 樹木則香、栢、蘗、檜、桑、榛, 雜草則靑芹、葵、艾、苧、楮。 其餘異樹奇草, 不知名, 難以盡記。 羽蟲則雁、鷹、鷗、鷺, 毛蟲則貓、鼠, 海産則藿、鰒而已。 三十日發船, 初八日還鎭。 島中所産可支魚皮二令、篁竹三箇、紫檀香二吐莫、石間朱五升、圖形一本, 監封上使” 云。 幷上送于備邊司
“4월 21일의 오후, 우리는 4대의 다른 배로 80명의 사람들과 준비해서 함께 출발했습니다. 처음에 날씨는 좋았으나, 초저녁에는 농무와 호우의 폭풍우가 왔기 때문에 4대의 배는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서로 시각을 잃었습니다. 이 가운데서(타이틀), 침착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복을 입고 해신에 제사를 드리고 많은 음식을 바다에 던졌습니다.(타이틀). 그 후, 그는 신호를 위해서 횃불을 들어 2대의 배와는 응답이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2대의 배는 볼 수 없었습니다. 22일 아침3-5시의 사이에, 남쪽에서 멀고 약한 물결에 돛을 단지 2대의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그 때, 누가 동쪽을 가리키며 “저기 안개 속에 구름과 같이 약간 보이는 것은 아마 섬의 산의 정상인것 같습니다…” 위 우측: 한 검찰관이 30 km로부터 본 울릉도의 이미지 – (계속)
“..이 말을 듣고, (…) 자세히 보니 그것은 섬의 모양이었다. (…) 그는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하여 북을 치고(..) 곧 이어 이 섬의 서편으로 데리고 가서 보트를 정박시켰다. 산꼭대기 부근을 점검하니, 골짜기 중간 30리와 정상에 중첩되는 자리에 시내가 있었다. 여기에는 좁은 도랑과 폭포를 따라 60개의 고랑이 난 논이 있었다.
왼쪽은 황토구미골인데, 오른쪽은 병풍석이고 북쪽은 향목정이며, 2년마다 나무를 베어냈기 때문에 향나무가 드문 드문 있다. 24일에 통구미진에 도착하여 골짜기는 통나무같이 생겨서 머리 윗쪽은 바위로 되었다. 바다는 그 바위에서부터 50걸음이 된다. 바위는 매우 가파르고 절벽으로 둘러싸였다. 우리는 골짜기 입구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산은 덩굴로 우거져 있었다.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 하고 갈대가 짙어서 헤쳐나가기 어려웠다…” (위: 붉은 진흙 동굴의 황토구미는 한창국이 상륙한 곳이다. -계속)
“…25일에 장작지포의 입구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는 대나무 밭이 있었다. 대나무는 드문드문 나 있었으며 별로 크지가 않았다. 대나무를 베어가면서 우리는 장작지포의 남쪽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골짜기 밑에서 정상 중간까지 수십리로 먼데, 논으로 활용될 수 있는 3곳의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3개의 섬이 있는데, 방패도가 북쪽에 있고, 죽도가 중간에 있으며 옹도가 동쪽에 있다. 이들 섬 간의 거리는 불과 백보 정도이고, 둘레는 각각 수 십파이다. 그러나 이들 바위들은 뾰죽하며 가파르고 오르기가 매우 어렵다. ㅡ 이 바위들 간이 거리는 백보 정도이다…” (오른쪽은 울릉도의 섬목에서 찍은 죽도섬의 사진이다. 한창국은 이것을 죽도라고 표현했고 우산도라고 말하지 않았다.)
거기서 하루 밤을 지새고 다음날, 26일 우리는 가지도로 갔는데 4-5마리의 강치가 뛰어 올라서 놀랐다. 그것들은 물개를 닮았고, 그 중 두 마리는 총에 몇 번 맞아 죽었다. 구미진의 지리적 모습은 매우 이상하게 생겼고, 10리정도를 골짜기로 들어가면 아직 활동적인 마을이 나타난다. 덩굴로 가득찬 양쪽 산은 너무 가파르게 되어 올라가기 어렵다.
다음에 우리는 죽암, 후포암, 공암, 죽산 등으로 조사를 떠났고, 통구미로 향하여 거기서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울릉도는 남북으로 78-80리이고 동서로는 50-60리가 되며 전체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옛날에 살던 집터가 있고 수백 섬의 곡식을 추수할 토지가 있었다…” (왼쪽은 검찰사 한창국이 보았을 것 같은 공암(코끼리 바위)의 확대사진이다.) – 계속
보트에서 30일에 떠나서, 우리는 다음달 8일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강치가죽 2개, 황죽3개, 자단 석각주 2개와 5개의 행랑을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다음으로, 이 리포트는 분명하게 울릉도와 주변 작은 섬의 이름을 거론한 두개의 보고서 중의 하나다. 아마, 방패도는 울릉도 북서쪽의 모퉁이의 이른바 관음도이다. 일부 일본인이 주장하는 죽도 섬은 우산도이다. 단지 죽도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타케시마와 우산도가 아닌 것이라고 1880년의 이규원의 다른 보고서에 동의하는 바이다. 마지막 섬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이 문서의 마지막 부분은, 그들이 울릉도를 조사한 방법에 관해서 짧은 설명을 한다. 그것은, 원주로서 가치를 주고 있는 섬의 주위에서 평가되는 그 한국의 전통적이 방식으로 울릉도 둘레를 100리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측정방법은 보트로 울릉도 사방 주위를 도는 거리와 울릉도에 닿는 시간과 거리를 감안하여 더하는 방식으로 측정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