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의 봄, 조선의 표준 순서에 따라, 한국은 울릉도에서 상황을 평가하도록 검사관을 파견했다. 이하의 페이지는, 검찰사 한창국을 대신하여 강원도 감사 심진현(沈晉賢)이 “당국이 울릉도에 연 2회의 여행을 하기 위한 순서라고 통지”하는 규칙에 따라서, 그의 의무를 알리기 위해서 공문을 한창국에게 보낸다. 이하는 검찰여행의 기록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울릉도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 보고서는 울릉도에 대해서 매우 자세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보고서로부터, 우리는 울릉도의 이웃 섬의 이름을 명확히 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는 우산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가?
먼저, 몇개의 지도를 조사하면, 독도 지역의 개요를 알 수 있게 된다. 아래의 좌측 지도는 모두 동해(일본해)를 나타낸다.울릉도는 역사적으로 독도의 서쪽으로 위치하였다.독도는 서양에서는 리앙코르 바위라고 알려져 있고 일본에서는 타케시마로 알려져 있다. 많은 역사 기록도 울릉도-독도 지역에서 한국이 보인다고 기술한다. 아래의 우측 지도는 울릉도를 말한다
상 좌측: 위지도는 한국의 동해안, 울릉도와 독도를 나타낸다.한국 정부는 2년 또는 3년간격으로 울릉도에 검사관을 보냈다.이 항해는, 울진 또는 삼척으로부터 시작되었다.울릉도에 가는 바람이 좋아서 가는데 하루가 걸릴 수도 있지만, 지도는 여행 시간이 대체로 2일 걸리는 것으로 표시한다. 위 우측: 울릉도는 지도는 참조를 위해서 섬의 중요한 지리적 모습을 나타낸다.
“4월 21일의 오후, 우리는 4대의 다른 배로 80명의 사람들과 준비해서 함께 출발했습니다. 처음에 날씨는 좋았으나, 초저녁에는 농무와 호우의 폭풍우가 왔기 때문에 4대의 배는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서로 시각을 잃었습니다. 이 가운데서(타이틀), 침착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복을 입고 해신에 제사를 드리고 많은 음식을 바다에 던졌습니다.(타이틀). 그 후, 그는 신호를 위해서 횃불을 들어 2대의 배와는 응답이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2대의 배는 볼 수 없었습니다. 22일 아침3-5시의 사이에, 남쪽에서 멀고 약한 물결에 돛을 단지 2대의 배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고 그 때, 누가 동쪽을 가리키며 “저기 안개 속에 구름과 같이 약간 보이는 것은 아마 섬의 산의 정상인것 같습니다…” 위 우측: 한 검찰관이 30 km로부터 본 울릉도의 이미지 – (계속)
“..이 말을 듣고, (…) 자세히 보니 그것은 섬의 모양이었다. (…) 그는 사람들을 독려하기 위하여 북을 치고(..) 곧 이어 이 섬의 서편으로 데리고 가서 보트를 정박시켰다. 산꼭대기 부근을 점검하니, 골짜기 중간 30리와 정상에 중첩되는 자리에 시내가 있었다. 여기에는 좁은 도랑과 폭포를 따라 60개의 고랑이 난 논이 있었다.
왼쪽은 황토구미골인데, 오른쪽은 병풍석이고 북쪽은 향목정이며, 2년마다 나무를 베어냈기 때문에 향나무가 드문 드문 있다. 24일에 통구미진에 도착하여 골짜기는 통나무같이 생겨서 머리 윗쪽은 바위로 되었다. 바다는 그 바위에서부터 50걸음이 된다. 바위는 매우 가파르고 절벽으로 둘러싸였다. 우리는 골짜기 입구로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며, 산은 덩굴로 우거져 있었다. 나무들은 하늘을 찌를 듯 하고 갈대가 짙어서 헤쳐나가기 어려웠다…” (위: 붉은 진흙 동굴의 황토구미는 한창국이 상륙한 곳이다. -계속)
위 왼쪽: 한창국이 상륙한 곳은 황토구미의 약간 오른쪽 골짜기와 시내 쪽이다. 위 오른쪽. 향목바위는 이때 한창국의 머무는 곳에서 북쪽으로 언급되고 있다. (두 번 클릭하시오)
“…25일에 장작지포의 입구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는 대나무 밭이 있었다. 대나무는 드문드문 나 있었으며 별로 크지가 않았다. 대나무를 베어가면서 우리는 장작지포의 남쪽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골짜기 밑에서 정상 중간까지 수십리로 먼데, 논으로 활용될 수 있는 3곳의 자리가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3개의 섬이 있는데, 방패도가 북쪽에 있고, 죽도가 중간에 있으며 옹도가 동쪽에 있다. 이들 섬 간의 거리는 불과 백보 정도이고, 둘레는 각각 수 십파이다. 그러나 이들 바위들은 뾰죽하며 가파르고 오르기가 매우 어렵다. ㅡ 이 바위들 간이 거리는 백보 정도이다…” (오른쪽은 울릉도의 섬목에서 찍은 죽도섬의 사진이다. 한창국은 이것을 죽도라고 표현했고 우산도라고 말하지 않았다.)
위 왼쪽: 울릉도 북쪽 석포에서 서쪽으로 본 광경은 숨막힐 듯한 광경이다. 위 오른쪽: 석포에서 서북쪽으로 본 광경, 그리고 뒤로는 죽도부분을 본 광경이다.
거기서 하루 밤을 지새고 다음날, 26일 우리는 가지도로 갔는데 4-5마리의 강치가 뛰어 올라서 놀랐다. 그것들은 물개를 닮았고, 그 중 두 마리는 총에 몇 번 맞아 죽었다. 구미진의 지리적 모습은 매우 이상하게 생겼고, 10리정도를 골짜기로 들어가면 아직 활동적인 마을이 나타난다. 덩굴로 가득찬 양쪽 산은 너무 가파르게 되어 올라가기 어렵다.
다음에 우리는 죽암, 후포암, 공암, 죽산 등으로 조사를 떠났고, 통구미로 향하여 거기서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울릉도는 남북으로 78-80리이고 동서로는 50-60리가 되며 전체가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옛날에 살던 집터가 있고 수백 섬의 곡식을 추수할 토지가 있었다…” (왼쪽은 검찰사 한창국이 보았을 것 같은 공암(코끼리 바위)의 확대사진이다.) – 계속
가장 일반적인 나무들은 향나무, 소나무, 뽕나무, 개암나무 등이다. 흔한 식물은 미나리, 아욱, 쑥, 모시, 그리고 닥나무이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너무들과 풀이 자라고 있지만,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기록할 수가 없다. 새의 종류로는 기러기, 매, 갈매기, 그리고 왜가리가 산다. 동물로서는 고양이, 쥐가 산다. 해산물로는 해초와 전복이 있다.
보트에서 30일에 떠나서, 우리는 다음달 8일에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강치가죽 2개, 황죽3개, 자단 석각주 2개와 5개의 행랑을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결론 – 한창국에 의한 1794의 점검 리포트의 분석
우리가 이 리포트를 읽었을 때, 최초로 밝히는 것은, 200년 전 울릉도에 관한 조선의 방침이다. 문제에 관해서는 많은 일본의 의견과는 달리, 조선의 울릉도 공도정책은 “방폐”의 형태가 아니었다. 위의 점검은 결코 선택이 아니었음을 밝혀준다“울릉도를 2년에 한번씩 차례대로 점검하는 공식적 규칙에 의하여 울릉도 순찰여행을 한다…” 이와 같이, 한국이 완전히 이 지역을「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실제, 조선은 흉작과 힘든시기에도, 이 보고서에서 말하듯이 조선은 이 지역을 계속해서 조사했다. 그들은 울릉도로부터 동물과 자원(예를 들면 자단과 바다사자)을 모았다.
다음으로, 이 리포트는 분명하게 울릉도와 주변 작은 섬의 이름을 거론한 두개의 보고서 중의 하나다. 아마, 방패도는 울릉도 북서쪽의 모퉁이의 이른바 관음도이다. 일부 일본인이 주장하는 죽도 섬은 우산도이다. 단지 죽도섬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타케시마와 우산도가 아닌 것이라고 1880년의 이규원의 다른 보고서에 동의하는 바이다. 마지막 섬의 성격은 불분명하다.
위의 이미지: 그림은 한국인이 말하는 죽도의 서쪽면이다. 일부의 일본인은 한국인이 이 섬에 의지하며 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작은 섬의 지형과 물의 부족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것 같지는 않다. (클릭 이미지)
심지현(沈之灦)에 의해서 전해지는 정보의 또 하나의 가치 있는 부분은, 죽도의 지형에 대한 것이다. 이규원은 1 세기 후에 말하기를 죽도는 너무나 가파르기 때문에 올라갈 수 없다. 죽도섬의 벽은 대략 100미터 높이로, 매우 험하다고 말했다. 식수가 죽도에서 발견되지 않아서 이 섬은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트를 정박시키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 문서의 마지막 부분은, 그들이 울릉도를 조사한 방법에 관해서 짧은 설명을 한다. 그것은, 원주로서 가치를 주고 있는 섬의 주위에서 평가되는 그 한국의 전통적이 방식으로 울릉도 둘레를 100리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측정방법은 보트로 울릉도 사방 주위를 도는 거리와 울릉도에 닿는 시간과 거리를 감안하여 더하는 방식으로 측정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