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에 대한 한국의 반대

한국은 1906년 3월 직접 일본의 독도 편입을 알고 항의하였다.
“언제부터 독도 – 다케시마 분쟁은 실제로 시작되었는가…?”
일본 외무성 또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 홈페이지에서 발간한 모든 간행물을 읽어보면, 그들은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이 리승만 라인을 선언했을 때 독도 – 다케시마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독도 분쟁은 1950대 초 훨씬 이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전부터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실적으로, 첫째 문서화된 증거로 보아 이 분쟁은 조선 관리들이 일본이 독도 편입을 인식한 후 일본에 통지를 한 때부터 발생하였다. 이 기사는 어떻게 한국정부와 언론이 일본의 한국영토 불법 획득에 대하여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대표단은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강탈에 대해서 울릉도 군수에게 알린다.
1906년 4월 1일 일본의 산음(山陰)신문 뉴스기사, “竹島土産,”
다음 부분에서 일본의 뉴스기사는 일본이 독도 편입 사실을 일년 후에 알리고 있음을 통지하는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 역시 1906년 울릉도 상황에 대한 내막을 알려준다. 아래 이미지들은 친일 다케시마 웹사이트가 제공한 뉴스기사이다.
1906년 4월 1일 일본 산음신문(San-in Shimbun) 뉴스기사, “竹島土産”
아래는 번역한 일본신문기사이다. 오른쪽에 아래 사진은 일본의 울릉도를 방문한 사람들. 이 중에는 나가이 요사부로 팽창주의 메이지 정부와 제국해군의 수로부를 통하여 독도 편입을 요청한 일본 민간인이 있다.
다케시마 검사 공무원

“… 약 50명의 사람들이 27일 오전 8시에 다케시마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상륙한 후 수십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강치가 섬에 살고 있었고, 그 중에 살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10마리를 잡았다. 어떤 것은 그물이나 총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곤봉으로 때려잡았다. 그 강치들은 3대의 배에 나누어 담고 오후 2:30에 출발하였는데 섬에는 김이 자라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울릉도의 저동(苧洞)에 약 오후 8시 경에 도착하였으며, 몇 몇 일본 경찰관, 우편국 직원, 그리고 다른 도동(道洞)에서 온 사람들이 배로 올라와 환영을 하였다. 그 중 몇 사람들은 우체국장 Kataoka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상륙하도록 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수(郡守)를 방문하였고 일본의 경찰이 역관으로 역할하였다. 그들은 섬의 상황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섬의 안을 조사하였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해안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오후 8시에 섬을 떠나, Saigo(오키)에는 다음날 오후 4:3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관리들이 주선하는 파티에 참석하였다. 다음 날 아침 오전 10시 그들은 떠나서 오후 3:30에 Sakai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그들은 곧 기선을 갈아탔다. 그들은 현의 관리에 도착하여 오후 7시에 현의 장관 Jinzai(神西)는 오키에서 두 사람의 현 의원, Nakajima 그리고 Ohno와 함께 섬(오키)를 조사하였다.

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들 중에서 한 마리를 요리하였다. 한 마리는 울릉도 군수, 그리고 다른 마지막 한 마리는 부두에서 위생연구를 위하여 남겨두었다.

그들이 울릉도 군수를 방문하였을 때, 관리 Jinzai(神西)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제국 시마네현에서 온 관리이다. 여러분의 섬과 다케시마는 우리의 관할 아래에 있고 가까이 있다. 많은 일본인은 당신네 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바란다. 만약 우리가 여기올 것을 계획했다면 선물을 가져오려 했겠지만 우연히 피난 오게 되어서, 선물이 하나도 없다. 다행히, 우리는 독도에서 잡은 강치를 가지고 왔으므로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니 받아주시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군수가 답하기를, “ 이 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그들을 보호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그리고 강치 선물을 받아들이겠다. 만약 맛이 좋고, 기회가 되면 다른 것도 받고 싶다…”

산음신문 뉴스기사 “竹島土産,” 분석
비록 주된 기사 주제는 일본의 대표가 울릉도를 방문한 것이지만, 이 몇가지 정보로 1906년 당시 섬의 동향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미 일본은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경찰과 수많은 민간인들을 조선의 섬에 주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마네 현의 Jinzai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숫자의 일본민간인들(도해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리고 비록 군수가 “..그들을 관찰..” 하겠다고 하였지만, 일본의 관리들이 마음대로 특별한 허락도 없이 한국의 울릉도 모든 지역에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사실 이 일본의 대표들은 요리한 강치를 작은 선물로 주었지만, 그것은 약간 무례한 일로 해석될 수 있다. 확실히, 그것은 외국의 고관이 또 다른 정부 관리에게 주는 인사의 선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위의 사실로 보아 한국의 울릉도는 1906년에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울도(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에 의해서 조선 영토가 편입된 사실에 듣고 왜 그에 대해서 직접 항의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왼쪽으로 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울릉도에서 일본 대표단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한국 국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일본의 울릉도 지역 관여에 대해서 말없는 항의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은 고시 40호를 통하여 Liancourt 섬을 다케시마(竹島)로 칭하고 오키 섬의 군수 관할로 둔다고 하였다. 일본정부는 이 결정을 공식관보에 공개하지 않았고, 중앙 정부차원에서 공표하지도 않았다. 여러분은 일본이 오가사와라 섬들에 대해서 1876년에 영토권을 취득한 외국과의 관련된 이전의 사례를 인용할 수 있다. 당시에, 일본정부는 깊이 관련된 영국과 미국과 함께 협상하고 난 후에 외국의 동의를 얻고 나서 결정하였다. 일본은 또한 12개 유럽국가들과 미국에 이런 행위에 대하여 통지를 하였다.
울도 감사 심흥택의 일본의 독도 편입 항의
아래 한국의 역사적 문서 기록에서 조선의 일본의 독도 편입에 관한 항의는 여러번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한국정부는 일본의 독도 강점에 대한 그들의 반대의사를 즉각 표시하였다.
3월 28일, Zinzai Yutaro과 그의 일행이 울릉도 군수 심흥택을 방문하고 일본의 독도 – 다케시마 편입을 통보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접한 심흥택은 다음날 이 내용을 중앙정부에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독도는 본 도에 속하며 울릉도에서 바다 100 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선이 우도에 있는 도동포에 정박하고 이달 4일 오전 8:00시경에 일단의 일본의 관리들이 저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독도가 현재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조사하러 왔다…”

이 때 군수 심흥택을 방문한 집단에는 시마네현 오키 섬 관리 Zinzai, 세무서장 Yoshida Meigo, 경찰파출소장, 헌병 Kageyama Iwahachiro, 한 명의 경찰관, 한 명의 지방 의원, 의사와 기술자 그리고 약 10여 명의 심부름꾼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이 방문한 목적은 첫째, 가구숫자, 인구, 생산물, 둘째, 직원 숫자와 비용 등을 조사하러 왔다. 기록이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이 보고서를 참고로 제출합니다.

음력 3월 5일, 광무 (1906) 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항의하다.
일본의 독도 편입에 반대한 사람은 심흥택 군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대한제국 도지사의 의견도 있다. 도지사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청색박스 안에 내용이 있다.

“…대한제국 지사 명령 No.3 나는 이 보고서를 읽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주장이며, 섬을 재점검하고, 일본인들의 행동을 점검하라…”

Zinzai 일행이 울릉도를 방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자료는 일본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 한국과의 분쟁에서, 일본정부는 이 문서 자체의 존재도 의문시하였다. 그 근거로 일본의 학자는 독도-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선물에 대해서 울릉군수가 감사했다는 기록을 밝혔다. 만약 군수가 독도-다케시마가 울릉도에 속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런 접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상황은 울릉도가 당시에 처한 어려운 입장을 간과한 것이다. 이 당시일본의 군인과 경찰은 영구적으로 울릉도에 주둔하였고, 3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도동 주변에 살고 있었으며, 일본 관리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라) 사실 Zinzai와 그의 일행들이 울릉도라는 외국영토에서 가구 수와 인구 수, 그리고 지리를 마음대로 조사한 것은 당시의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말한다. 만약 군수 심흥택이 Zinzai과 그의 일행들의 영토문제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본인들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예의바른 일본인 대접은 그가 Zinzai의 언급을 승인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자료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 독도 편입에 항의하는 한국의 서울 언론
왼쪽 이미지는 대한매일신문의 뉴스기사 원본이다. 보고서는 울도(울릉도과 지역)의 군수가 보낸 내용을 싣고 있다. 그것에도 역시 일본의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시킨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1일 1906, 울도 군수 심흥택이 내부대신에게 보고하기를 어떤 일본인 관리들이 울릉도 섬으로 와서 주장하기를 독도를 일본영토이며, 섬을 측량하고 당시 가구 수를 조사하였다. 보고서(심흥택의 보고서)에 대한 대답으로 내무대신이 말하기를 “일본관리들이 울릉도를 그 지역을 여행하고 조사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는 일본의 주장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애국자 황현은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항의하다.
“..황현은 누구인가..?”
황현(1855년-1910)은 애국적인 조선말기 한국 학자이다. 그는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그의 별호는 “매천” 이며, 학자 황의돈과 관련된다. 광양에서 출생한 황현은 전라남도 구례에서 성장하였다. 황현은 1910년 일본의 한국 합병을 항의하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황현은 매천야록이라는 일기를 남겼다.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불법독도 편입에 관한 것이다. 그 일기내용은 일본의 독도편입의 항의하는 신문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황현이 신문내용을 그대로 읽은 것인지 다른 한국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황현의 1906년 5월,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距鬱陵島洋東百里 有一島 曰獨島 舊屬鬱陵島 倭人勒稱其領地 審査以去

”…울릉도 동쪽 약 100 리에는 독도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섬은 울릉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와서 섬을 측량하고 근거도 없이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울릉도에 관하여 일본 통감부가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질의한 내용
1906년 7월 13일 한국의 신문,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말하기를 일본의 통감부가 한국 내무대신에게 울릉도의 이웃 섬들은 무엇인지 분명히 해달라고 질문하였다. 또한 섬의 한국정부사무소가 개설된 것이 언제인지를 질문하였다. 이 질의는 한국 주장 독도는 울릉도의 일부라는 한국의 주장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 사실상 항의하고 일본은 그 항의 문서를 받는다.

오늘날 몇 몇 사람들은 일본의 독도주장에서 한국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제외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지한다. 일본의 로비스트들은 조선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하였을 것이라는 한국 내무성의 반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관련된 역사적 지도들과 기록을 연구해보면, 그들의 결론은 부정확하다. 아래는 원본문서, 번역과 간략한 기록의 분석이다.

1906 7월 13일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과 영문번역
鬱島郡의 配置顛末

統監府에서 內部에 公函하되 江原道 三陟郡 管下에 所在 鬱陵島에 所属島嶼와 郡廳設始 年月을 示明하라는 故로 答函하되、光武二年五月二十日에 鬱陵島監으로 設始 하였다가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에 政府會議를 經由하야 郡守를 配置하니 郡廳은 台霞洞에 在하고 該郡所管島는 竹島石島오、東西가 六十里오 南北이 四十里니, 合 二百餘里라고 하였다더라.

울도군의 설치 사실

통감부는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강원도 삼척군에 속하는 울릉도에 속하는 섬이 무엇인지를과 관청을 설치한 것이 언제인지를 밝혀달라는 공식서한을 질의서로 보냈다. 그이에 대한 회신은 울릉도 행정관청은 1898 5월 20일에 설치되었고, 당시 1900년 10월 25일, 정부는 군수를 임명하고 군의 관청을 태하동(台霞洞)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소속하는 섬은 죽도(竹島)과 석도(石島)로 하고, 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60리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40리로 전체 둘레가 200리라고 하였다.

1906년 7월 13일 통감부의 질의과 한국 내무성 회신 분석
“한국의 내무성은 이 기록에서 독도를 울도군에서 제외시켰는가..?”
한국 내무성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한국내무성이 통감부에 회신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자료의 출처와 그러한 언급이 나오는 차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울릉도는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로 된다고 언급하였다. 어떤 일본인들은 이것은 전체 울도 주가 너무 작아서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울릉도의 크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19 세기 울릉도 지도들에서 크기의 측정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일본의 통감부는 울릉도 크기에서 울도 주변의 모든 섬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위 지도들은 한국의 내무성이 울릉도에 대하여 통감부로 회신한 내용에서 울도의 크기를 언급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지도에서 울릉도의 크기는 東西 六十里 南北 四十里周二百餘里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동서로 약 60리, 남북이 40리과 전체(주변둘레)이 약 200리라고 하였다.
다른 자료 일부에서 우리는 한국의 내무성의 회신에는 울도의 일부로서 죽도(竹島) 섬과 Seokdo(독도) 섬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의 부속된 섬들의 위치는 내무성의 회신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울도 지방의 섬들에 관한 정보의 근원은 1900년 조선의 칙령 41호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링크) 위의 자료에서 볼 때, 그것의 명확한 한국 내무성의 일본의 통감부에 대한 회신에는 명확하게 울도 군 전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에 대하여 문서로 반대를 표시하였다. – 결론
이 기사의 전반부에서는 단순히 심흥택 군수의 언급만 요약하였으나, 후반부에서는 한국 중앙정부의 반응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다. 즉, 한국의 중앙정부는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 조항에서는 일본의 관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의심스런 면을 볼 수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신문을 통하여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편입시키려 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영토에 대한 침략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전라도 구례에 살던 황현은 당시 기록하기를 “일본인들은 우리 고유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중앙정부, 울릉도 지방군수과 시민들은 모두 당시에 일본의 독도편입이 침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은 실제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였고, 한국에 총독을 두었다. 일본의 한국땅 주둔 이전의 독도 편입 증거는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링크 1), (링크 2), (링크 3).

일본 제국해군이 실시한 독도에 대한 측량문서는 이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링크1), (링크 2), (링크3). 왜 한국정부는 당시 다케시마 – 독도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난다.

전체 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힘을 잃게 됨에 따라 작은 바위 섬의 소유권 문제는 논의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명확히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반대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평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