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 50명의 사람들이 27일 오전 8시에 다케시마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상륙한 후 수십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강치가 섬에 살고 있었고, 그 중에 살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10마리를 잡았다. 어떤 것은 그물이나 총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곤봉으로 때려잡았다. 그 강치들은 3대의 배에 나누어 담고 오후 2:30에 출발하였는데 섬에는 김이 자라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울릉도의 저동(苧洞)에 약 오후 8시 경에 도착하였으며, 몇 몇 일본 경찰관, 우편국 직원, 그리고 다른 도동(道洞)에서 온 사람들이 배로 올라와 환영을 하였다. 그 중 몇 사람들은 우체국장 Kataoka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상륙하도록 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수(郡守)를 방문하였고 일본의 경찰이 역관으로 역할하였다. 그들은 섬의 상황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섬의 안을 조사하였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해안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오후 8시에 섬을 떠나, Saigo(오키)에는 다음날 오후 4:3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관리들이 주선하는 파티에 참석하였다. 다음 날 아침 오전 10시 그들은 떠나서 오후 3:30에 Sakai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그들은 곧 기선을 갈아탔다. 그들은 현의 관리에 도착하여 오후 7시에 현의 장관 Jinzai(神西)는 오키에서 두 사람의 현 의원, Nakajima 그리고 Ohno와 함께 섬(오키)를 조사하였다.
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들 중에서 한 마리를 요리하였다. 한 마리는 울릉도 군수, 그리고 다른 마지막 한 마리는 부두에서 위생연구를 위하여 남겨두었다.
그들이 울릉도 군수를 방문하였을 때, 관리 Jinzai(神西)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제국 시마네현에서 온 관리이다. 여러분의 섬과 다케시마는 우리의 관할 아래에 있고 가까이 있다. 많은 일본인은 당신네 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바란다. 만약 우리가 여기올 것을 계획했다면 선물을 가져오려 했겠지만 우연히 피난 오게 되어서, 선물이 하나도 없다. 다행히, 우리는 독도에서 잡은 강치를 가지고 왔으므로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니 받아주시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군수가 답하기를, “ 이 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그들을 보호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그리고 강치 선물을 받아들이겠다. 만약 맛이 좋고, 기회가 되면 다른 것도 받고 싶다…”
시마네 현의 Jinzai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숫자의 일본민간인들(도해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리고 비록 군수가 “..그들을 관찰..” 하겠다고 하였지만, 일본의 관리들이 마음대로 특별한 허락도 없이 한국의 울릉도 모든 지역에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사실 이 일본의 대표들은 요리한 강치를 작은 선물로 주었지만, 그것은 약간 무례한 일로 해석될 수 있다. 확실히, 그것은 외국의 고관이 또 다른 정부 관리에게 주는 인사의 선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위의 사실로 보아 한국의 울릉도는 1906년에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울도(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에 의해서 조선 영토가 편입된 사실에 듣고 왜 그에 대해서 직접 항의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왼쪽으로 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울릉도에서 일본 대표단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한국 국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일본의 울릉도 지역 관여에 대해서 말없는 항의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독도는 본 도에 속하며 울릉도에서 바다 100 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선이 우도에 있는 도동포에 정박하고 이달 4일 오전 8:00시경에 일단의 일본의 관리들이 저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독도가 현재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조사하러 왔다…”
이 때 군수 심흥택을 방문한 집단에는 시마네현 오키 섬 관리 Zinzai, 세무서장 Yoshida Meigo, 경찰파출소장, 헌병 Kageyama Iwahachiro, 한 명의 경찰관, 한 명의 지방 의원, 의사와 기술자 그리고 약 10여 명의 심부름꾼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이 방문한 목적은 첫째, 가구숫자, 인구, 생산물, 둘째, 직원 숫자와 비용 등을 조사하러 왔다. 기록이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이 보고서를 참고로 제출합니다.
음력 3월 5일, 광무 (1906) 10년….”
“…대한제국 지사 명령 No.3 나는 이 보고서를 읽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주장이며, 섬을 재점검하고, 일본인들의 행동을 점검하라…”
Zinzai 일행이 울릉도를 방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자료는 일본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 한국과의 분쟁에서, 일본정부는 이 문서 자체의 존재도 의문시하였다. 그 근거로 일본의 학자는 독도-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선물에 대해서 울릉군수가 감사했다는 기록을 밝혔다. 만약 군수가 독도-다케시마가 울릉도에 속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런 접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상황은 울릉도가 당시에 처한 어려운 입장을 간과한 것이다. 이 당시일본의 군인과 경찰은 영구적으로 울릉도에 주둔하였고, 3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도동 주변에 살고 있었으며, 일본 관리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라) 사실 Zinzai와 그의 일행들이 울릉도라는 외국영토에서 가구 수와 인구 수, 그리고 지리를 마음대로 조사한 것은 당시의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말한다. 만약 군수 심흥택이 Zinzai과 그의 일행들의 영토문제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본인들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예의바른 일본인 대접은 그가 Zinzai의 언급을 승인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자료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5월 1일 1906, 울도 군수 심흥택이 내부대신에게 보고하기를 어떤 일본인 관리들이 울릉도 섬으로 와서 주장하기를 독도를 일본영토이며, 섬을 측량하고 당시 가구 수를 조사하였다. 보고서(심흥택의 보고서)에 대한 대답으로 내무대신이 말하기를 “일본관리들이 울릉도를 그 지역을 여행하고 조사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는 일본의 주장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황현은 매천야록이라는 일기를 남겼다.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불법독도 편입에 관한 것이다. 그 일기내용은 일본의 독도편입의 항의하는 신문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황현이 신문내용을 그대로 읽은 것인지 다른 한국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황현의 1906년 5월,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距鬱陵島洋東百里 有一島 曰獨島 舊屬鬱陵島 倭人勒稱其領地 審査以去
”…울릉도 동쪽 약 100 리에는 독도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섬은 울릉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와서 섬을 측량하고 근거도 없이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몇 몇 사람들은 일본의 독도주장에서 한국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제외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지한다. 일본의 로비스트들은 조선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하였을 것이라는 한국 내무성의 반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관련된 역사적 지도들과 기록을 연구해보면, 그들의 결론은 부정확하다. 아래는 원본문서, 번역과 간략한 기록의 분석이다.
統監府에서 內部에 公函하되 江原道 三陟郡 管下에 所在 鬱陵島에 所属島嶼와 郡廳設始 年月을 示明하라는 故로 答函하되、光武二年五月二十日에 鬱陵島監으로 設始 하였다가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에 政府會議를 經由하야 郡守를 配置하니 郡廳은 台霞洞에 在하고 該郡所管島는 竹島石島오、東西가 六十里오 南北이 四十里니, 合 二百餘里라고 하였다더라.
울도군의 설치 사실
통감부는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강원도 삼척군에 속하는 울릉도에 속하는 섬이 무엇인지를과 관청을 설치한 것이 언제인지를 밝혀달라는 공식서한을 질의서로 보냈다. 그이에 대한 회신은 울릉도 행정관청은 1898 5월 20일에 설치되었고, 당시 1900년 10월 25일, 정부는 군수를 임명하고 군의 관청을 태하동(台霞洞)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소속하는 섬은 죽도(竹島)과 석도(石島)로 하고, 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60리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40리로 전체 둘레가 200리라고 하였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신문을 통하여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편입시키려 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영토에 대한 침략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전라도 구례에 살던 황현은 당시 기록하기를 “일본인들은 우리 고유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일본 제국해군이 실시한 독도에 대한 측량문서는 이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링크1), (링크 2), (링크3). 왜 한국정부는 당시 다케시마 – 독도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난다.
전체 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힘을 잃게 됨에 따라 작은 바위 섬의 소유권 문제는 논의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명확히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반대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평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