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두운 시대에 관한 영어로 된 자세한 내용은 그 동안의 내용을 책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불법 독도편입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체 한반도의 편입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고리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페이지의 목적은 동북아에서 일본의 독도 “편입”이 명확히 일본의 침략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래 문장에서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근원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래는 시마네현이 한국의 독도편입을 하기 이전과 그 중간에 일본이 개입한 역사적인 윤곽을 보여 준다. 지도는 일본 식민제국이 모든 방향으로 확장한 땅들을 보여 준다.
오른쪽에, 도쿄 만화에서 한국인 부부가 일본의 태양신 아마데라스(Amaterasu) 신사에 절을 하고 있다. 바위 동굴을 열고 있는 일본 남자는 일본의 초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Terauchi) 장군이다.
서양이 일본에 통상개시를 요구하는 방법은 도쿠가와(德川家康-Tokugawa) 막부(1603-1868)를 위협하여 전쟁을 하려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이 통상조약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 조약은 소위 “우호 통상조약”으로 중국은 1842, 1858 그리고 1860년 서명하였다. 서양은 1850년 일본과 서명하였고, 한국과는 1880년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들 조약은 강압에 의한 불평등 계약이었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영국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 권리 그리고 특권이 보장되는 비상호적인 차원의서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아래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은 이후에 이와 같은 방식을 전체 한반도의 편입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데 적용한다. 위 왼쪽: 한 예술가가 Commodore Perry가 Yokohama에서 일본제국 사절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일본의 주장은 한국이 예상치 않게 공격을 하였다는 것이고, 실제 사건에서 우리가 보는 바는 운양호의 상륙은 의도적으로 한국을 자극하여 군사적 대치를 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단순화” 작업이었다. 오른쪽은 일본 전함 운양호의 모습이다.
이들은 다음 사실에서 명확한 바와 같이 그 공격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이었다. 1. 상륙은 부산에서의 한-일간의 협상이 결렬된 것과 같이 발생한 것이다. 2. 이것은 운양호의 물자가 떨어진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가장 전략 위치에서 발생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3.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은 불법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온들 프랑스 그리고 미국 선박에 대해서도 발포를 하였다.
3 개월 후 일본의 태정관이 한국으로 사절로 왔다. 표면적인 목적은 강화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실제 목표는 한국을 “개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절은 Kuroda Kiyotaka가 이끌고 그는 한국 “공격”에 대한 면책을 지시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국제법”에 근거한 조약을 체결하려는 것이었다.
이 증거는 메이지 정부가 만약 구로다이노우에(Kuroda-Inoue)의 임무가 달성되지 않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공격을 당할 경우, 한국에 대하여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준비를 한 것이다. Kuroda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행동계획은“협상”이 결렬될 경우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협상기간 동안 Kuroda는 한국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침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몇 일 후 800명의 군인들을 태운 군함이 도착하자, Kuroda Kiyotaka 한국인들에게 4천명이 왔다고 알렸다.
1876년 여름 강화도 조약은 “재협상”되었다. 그러나 보완된 조약은 서구열강들이 수 십년 전에 일본과 체결한 조약보다 더 불공평한 것이었다. 첫째, 일본은 일본 명목화폐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된다. 두 번째 한국은 일본의 수입과 수출에 대하여 세금을 전적으로 면제한다. 세 번째, 일본은 한국과의 교역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왼쪽으로, 일본의 1878년 Maru-Maru 신문 만화에는 인형축제 연출로 세계 국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모습은 위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과 중국은 아래에서 절을 하고 있다.(이미지 클릭)
6월 10일 Otori Keisuke 일본 대신이 수 백 명의 해군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기 전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한국정부는 강하게 항의하였지만, 그러나 일본 공사는 그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일본 민간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언급한 바와 같이 여순 불공정 조약은 1882년에 서명되었고, 조약 5조에서 일본의 공사 그리고 일본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허용되었다. 6월 말에는 일본정부가 8000 명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국에 일본의 존속하는 동안 고종왕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 예를 들면 러시아, 미국 그리고 영국에 철도, 광산 그리고 벌채권 양해를 인정하였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은 Lushunkou(여순항)을 점령한다. 일본 군대는 그 도시의 중국 민간 거주민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하고 그 사건은 여순항 학살시건으로 명명된다. 그 후 웨이하이웨이(위해위-威海卫 Weihaiwei)는 1895년 2월 2일 함락되고, 그리고 혹독한 겨울 날씨가 풀리자 일본군은 남 만주 그리고 북부 중국을 압박하였다. 1895년 3월 일본은 베이징(북경-北京Beijing)에 근접한 바다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중국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하관-下關Shimomoseki)에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의 전적인 독립을 합의하고, 남쪽 Fengtian 성에 있는 요동(Liadong) 반도, 만주, 대만 그리고 팽호열도(Pescadores) 섬들을 일본에 영구히 할양하였다. 오른쪽 지도는 일본이 그 시기에 획득한 땅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1900년 이전에 대만, 혹카이도, 쿠릴열도는, 팽호열도(Pescadores), 요동(Liatung) 반도, Marcus 섬, Bonin 섬 그리고 Miyako – Yaeyama 모든 지역을 획득한다.
러시아는 즉시 전체 요동(Liandong) 반도로 나아가, 특히 여순항을 요새로 만들었다. 프랑스와 독일도 역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항구와 교역을 양해받았다. 산동반도의 칭다오(청도-靑島Qingdao-산동반도Shandong)는 독일이 차지하고, 위해위(Weihaiwei)는 영국이 차지하였다.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쓴맛을 보았고, 1904년-1905년 러일전쟁을 위한 씨를 뿌렸다. 3국 간섭의 교훈은 또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 과다한 공격을 가할 경우 강대국들이 간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이 오른쪽 문서는 1904년 제물포(인천)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에게 보낸 일본 제독의 편지 원본이다. 그것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해군개입이 있고 난 후, 모든 러시아 선박은 소개되었으나, 일본군은 인천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계속 진격하였고, 수 주일 동안 한국을 강제로 협박하여 일본-한국 의정서를 서명케 하였고, 다음해 1905년 일본-한국 보호조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내용을 읽어보시려면 이미지 클릭하시오)
러일전쟁이 시작되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은 함대 헤이하치로 도고 제독의 지휘아래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정 수척을 급습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히면서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일본 거류민들은 일본해군 1전대 무장 순항함과 5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8척의 어뢰함들이 한국의 입구인 인천 팔미도에 있는 두 척의 러시아전함들을 포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나중의 역사가들은 일본의 여순항 공격은 단순히 개항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물포(인천)에서 한국침략 전쟁의 시작을 위한 실제 작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중요한 작전은 후임 제독 Uriu Sotokichi에게 주어졌다. 팔미도(여덜미)에서 불과 7마일 떨어진 곳에 러시아 순양함 Varyag 그리고 전함 Korietz가 정박하고 있었다.
오후까지 일본 전대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게 되자 Korietz함과 심하게 손상당한 Varyag호는 제물포항으로 돌아가, 거기에 있는 중립선에 피난하게 되었다. 오후 4시, Korietz 호는 황급히 도망하게 된다.
위 오른쪽 이미지는 폐물이 된 Korietz이다. 중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는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Korietz도 선원들과 함께 도망쳤다. 아래 오른쪽 위는 모든 러시아 함정들이 포획당하는 것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을 선전하는 포스터이다.
몇 몇 일본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한국 조정은 놀라고 걱정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두 주일 후에 하야시 곤수케(林權助)가 한국 지도자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일본군이 한국영토에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의정서에 서명을 하게 한다. 의정서는 1904년 2월 23일에 서명되었고, 한국이 만약 제3국의 침략 또는 국제적인 간섭을 당할 때에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하여 일본이 전략적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었다.
모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하야시 공사는 반일 지도자들을 한국에서 모두 제거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 1904년 2월 23일, 일본이 한국을 편입하기 약 1년 전에, 일본군대는 “합법적으로” 한국 주둔을 허용 받았다.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공식적인 보호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일본은 실질적으로 한국 주권을 침략하였던 것이다.
일본이 왜 1905년 독도를 외국에게 통지하지 않고 자국영토로 편입시켰는지는 명확하다. 1900년대 초기 일본의 가장 큰 걱정은 외국의 간섭세력이 군대뿐 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자문관을 철수시키도록 요구하고, 장래 한국에 대한 모든 기회를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서구열강들의 3국 간섭으로 인한 쓰디쓴 경험을 한 일본정부는 무모한 변화로 인한 외국간섭을 피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 속에 두려는 정책을 신중하게 진행시키면서 외국 강대국들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기다렸다.(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일본의 다케시마 웹사이트는 1870년~1905년 일본의 한국개입을 기술하면서 기본적 역사 또는 정치적 맥락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그들의 팽창주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몇 몇 일본인들은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그 이전 또는 그 중간에, 합법적으로 땅을 획득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운동은 과거를 밝혀야하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대외정책과 같은 선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