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1905년 일본의 한국개입과 독도

메이지 초기 1870년에서 1905년 일본과 한국의 정치적 관계
일본 외무성의 정책에서 독도 -다케시마 분쟁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한국에서 독도 편입이전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관한 영어로 된 자세한 내용은 그 동안의 내용을 책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불법 독도편입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체 한반도의 편입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고리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페이지의 목적은 동북아에서 일본의 독도 “편입”이 명확히 일본의 침략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래 문장에서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근원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래는 시마네현이 한국의 독도편입을 하기 이전과 그 중간에 일본이 개입한 역사적인 윤곽을 보여 준다. 지도는 일본 식민제국이 모든 방향으로 확장한 땅들을 보여 준다.

오른쪽에, 도쿄 만화에서 한국인 부부가 일본의 태양신 아마데라스(Amaterasu) 신사에 절을 하고 있다. 바위 동굴을 열고 있는 일본 남자는 일본의 초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Terauchi) 장군이다.

흑선의 아시아 도착
일본이 한국/독도에서 왜 무엇을 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첫째 일본이 한국에 침략하기 이전에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단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1850년 미국과 유럽 전함들은 일본 해안선에 상륙하기 시작한다. 젊은 미래의 메이지 지도자들은 그 전함들이 일본 에도 해안에 당당히 상륙하는 것을 대책없이 쳐다보았다.

서양이 일본에 통상개시를 요구하는 방법은 도쿠가와(德川家康-Tokugawa) 막부(1603-1868)를 위협하여 전쟁을 하려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이 통상조약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 조약은 소위 “우호 통상조약”으로 중국은 1842, 1858 그리고 1860년 서명하였다. 서양은 1850년 일본과 서명하였고, 한국과는 1880년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들 조약은 강압에 의한 불평등 계약이었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영국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 권리 그리고 특권이 보장되는 비상호적인 차원의서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아래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은 이후에 이와 같은 방식을 전체 한반도의 편입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데 적용한다. 위 왼쪽: 한 예술가가 Commodore Perry가 Yokohama에서 일본제국 사절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875년 강화도 사건과 한국의 개항
보는 바와 같이, (링크를 보시오) 강화도 조약을 통한 일본의 한국 침략계획이 문서화 된 것은 1869년 이전으로 돌아간다. 1875년 9월 20일 아침, 일본해군 선박 운양호(Un-yo Maru)는 측량한국 서해안을 측량하기 위하여 강화도 해변에 상륙하여 “식수와 물자”를 요구하였다. 한국 해변수비대가 운양호에 발포를 하자, 일본의 반응은 신속하고도 단호했다. 잘 갖추어진 무장으로 일본 군대는 형편없는 구식총포 장비를 가진 한국군을 신속히 궤멸시켰다.(35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의 주장은 한국이 예상치 않게 공격을 하였다는 것이고, 실제 사건에서 우리가 보는 바는 운양호의 상륙은 의도적으로 한국을 자극하여 군사적 대치를 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단순화” 작업이었다. 오른쪽은 일본 전함 운양호의 모습이다.

이들은 다음 사실에서 명확한 바와 같이 그 공격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이었다. 1. 상륙은 부산에서의 한-일간의 협상이 결렬된 것과 같이 발생한 것이다. 2. 이것은 운양호의 물자가 떨어진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가장 전략 위치에서 발생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3.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은 불법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온들 프랑스 그리고 미국 선박에 대해서도 발포를 하였다.

3 개월 후 일본의 태정관이 한국으로 사절로 왔다. 표면적인 목적은 강화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실제 목표는 한국을 “개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절은 Kuroda Kiyotaka가 이끌고 그는 한국 “공격”에 대한 면책을 지시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국제법”에 근거한 조약을 체결하려는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과 한국에 대한 의미
강화도 조약은 몇 가지 조항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면 일본의 부산에서의 자유교역 개항, 서울과 부산 간 일본인의 자유 여행권 허용, 일본함정의 한국측량권, 일본이 개항에서 교역을 조절할 권리 등이다. 간략히 말하면, 이 합의서는 서양 사람들이 수 십 년전에 일본에게 부과한 불공정 조약과 유사하다.

이 증거는 메이지 정부가 만약 구로다이노우에(Kuroda-Inoue)의 임무가 달성되지 않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공격을 당할 경우, 한국에 대하여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준비를 한 것이다. Kuroda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행동계획은“협상”이 결렬될 경우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협상기간 동안 Kuroda는 한국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침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몇 일 후 800명의 군인들을 태운 군함이 도착하자, Kuroda Kiyotaka 한국인들에게 4천명이 왔다고 알렸다.

1876년 여름 강화도 조약은 “재협상”되었다. 그러나 보완된 조약은 서구열강들이 수 십년 전에 일본과 체결한 조약보다 더 불공평한 것이었다. 첫째, 일본은 일본 명목화폐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된다. 두 번째 한국은 일본의 수입과 수출에 대하여 세금을 전적으로 면제한다. 세 번째, 일본은 한국과의 교역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19 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중요한 사건을 통하여 본 일본의 한국에 대한 대외정책의 모습. 1882년 제물포 조약은 한국에 의하여 서명되었으며, 그리고 이것은 일 년 후 중요한 의미를 보여준다. 1894년 봄에는 동학란이 발생한다. 중국군이한국으로 진출하자, 일본군은 5개 사단을 동원하여 몇 몇 수송항을 점령하였다.

왼쪽으로, 일본의 1878년 Maru-Maru 신문 만화에는 인형축제 연출로 세계 국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모습은 위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과 중국은 아래에서 절을 하고 있다.(이미지 클릭)

6월 10일 Otori Keisuke 일본 대신이 수 백 명의 해군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기 전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한국정부는 강하게 항의하였지만, 그러나 일본 공사는 그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일본 민간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언급한 바와 같이 여순 불공정 조약은 1882년에 서명되었고, 조약 5조에서 일본의 공사 그리고 일본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허용되었다. 6월 말에는 일본정부가 8000 명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국에 일본의 존속하는 동안 고종왕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 예를 들면 러시아, 미국 그리고 영국에 철도, 광산 그리고 벌채권 양해를 인정하였다.

1차 중-일 전쟁 – 1894년 8월 1일 – 1895년 4월 17일
중일전쟁은 공식적으로 1894년 8월 1일 포고되었고, 일본제국은 9월 16일 평양(Pyeongyang) 전투에서 허술한 무장을 한 중국군을 패배시키고 신속하게 만주로 진격하였다. 일본제국 해군은 중국 Beiyang 함대의 12척 전함 중에서 8척을 1894년 9월 17일 압록강(Yalu River)입구에서 격침시킨다. 중국함대는 그 뒤에 웨하이(Weihwai) 요새로 후퇴하였으나 당시 일본 육군의 측면공격에 매우 놀랐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은 Lushunkou(여순항)을 점령한다. 일본 군대는 그 도시의 중국 민간 거주민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하고 그 사건은 여순항 학살시건으로 명명된다. 그 후 웨이하이웨이(위해위-威海卫 Weihaiwei)는 1895년 2월 2일 함락되고, 그리고 혹독한 겨울 날씨가 풀리자 일본군은 남 만주 그리고 북부 중국을 압박하였다. 1895년 3월 일본은 베이징(북경-北京Beijing)에 근접한 바다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중국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하관-下關Shimomoseki)에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의 전적인 독립을 합의하고, 남쪽 Fengtian 성에 있는 요동(Liadong) 반도, 만주, 대만 그리고 팽호열도(Pescadores) 섬들을 일본에 영구히 할양하였다. 오른쪽 지도는 일본이 그 시기에 획득한 땅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1900년 이전에 대만, 혹카이도, 쿠릴열도는, 팽호열도(Pescadores), 요동(Liatung) 반도, Marcus 섬, Bonin 섬 그리고 Miyako – Yaeyama 모든 지역을 획득한다.

중-일 전쟁과 3국 간섭
3국 간섭은 일본에게는 독도편입과 한국 합병의 방법에 대한 악몽과 같은 것이었다. 중일 전쟁 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함께 연합하여 일본의 만주영토 진출을 막고 그들 스스로를 위하여 영토를 반환하도록 일본을 압박하였다.

러시아는 즉시 전체 요동(Liandong) 반도로 나아가, 특히 여순항을 요새로 만들었다. 프랑스와 독일도 역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항구와 교역을 양해받았다. 산동반도의 칭다오(청도-靑島Qingdao-산동반도Shandong)는 독일이 차지하고, 위해위(Weihaiwei)는 영국이 차지하였다.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쓴맛을 보았고, 1904년-1905년 러일전쟁을 위한 씨를 뿌렸다. 3국 간섭의 교훈은 또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 과다한 공격을 가할 경우 강대국들이 간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1904년~1905년 러일전쟁
다른 논의에서는 한국이 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서 1906년에 강하게 반발하지 못했던가 하는 점을 논의한다. 1905년의 보호조약 이전 상황은 어떠했는가? 아래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의 주권가 항거하기 위한 능력은 1905년 이전에 양허되었다.

이 오른쪽 문서는 1904년 제물포(인천)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에게 보낸 일본 제독의 편지 원본이다. 그것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해군개입이 있고 난 후, 모든 러시아 선박은 소개되었으나, 일본군은 인천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계속 진격하였고, 수 주일 동안 한국을 강제로 협박하여 일본-한국 의정서를 서명케 하였고, 다음해 1905년 일본-한국 보호조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내용을 읽어보시려면 이미지 클릭하시오)

러일전쟁이 시작되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은 함대 헤이하치로 도고 제독의 지휘아래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정 수척을 급습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히면서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일본 거류민들은 일본해군 1전대 무장 순항함과 5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8척의 어뢰함들이 한국의 입구인 인천 팔미도에 있는 두 척의 러시아전함들을 포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나중의 역사가들은 일본의 여순항 공격은 단순히 개항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물포(인천)에서 한국침략 전쟁의 시작을 위한 실제 작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중요한 작전은 후임 제독 Uriu Sotokichi에게 주어졌다. 팔미도(여덜미)에서 불과 7마일 떨어진 곳에 러시아 순양함 Varyag 그리고 전함 Korietz가 정박하고 있었다.

Varyag호는 일본 전대의 Uriu 제독으로부터 매우 불리한 전투를 맞이하여(한척의 순양함, 다섯척의 호위 순양함 그리고 8척의 어뢰정) 인천에서 장렬한 목숨을 맞이하였다. 82명의 해군장병이 죽고, 190명이 부상당하였으며(전체 570명) 우세한 화력을 가진 선원들은 항복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배는 격침되였다. 그리고 선원들은 구출되었다.

오후까지 일본 전대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게 되자 Korietz함과 심하게 손상당한 Varyag호는 제물포항으로 돌아가, 거기에 있는 중립선에 피난하게 되었다. 오후 4시, Korietz 호는 황급히 도망하게 된다.

왼쪽 위 두 이미지들의 내용은 러시아함 Varyag이다. 위 사진은 1900년에 찍은 것이다. 아래 사진은 1904년 2월 9일 제물포(인천) 전쟁 후에 찍은 것이다. 그리고 심하게 손상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Varyag은 나중에 일본에 의해서 인양되고 수리되어 일본제국 해군 경순양함 Soya함으로 복무하게 된다.

위 오른쪽 이미지는 폐물이 된 Korietz이다. 중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는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Korietz도 선원들과 함께 도망쳤다. 아래 오른쪽 위는 모든 러시아 함정들이 포획당하는 것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을 선전하는 포스터이다.

일본군의 한국영토 점령이 시작되다.
인천항이 일본의 통제 아래에 들어간지 몇 시간 만에 중요지점은 일본군이 보초를 서게 되고 일본병사들이 거리를 행진하게 된다.

몇 몇 일본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한국 조정은 놀라고 걱정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두 주일 후에 하야시 곤수케(林權助)가 한국 지도자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일본군이 한국영토에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의정서에 서명을 하게 한다. 의정서는 1904년 2월 23일에 서명되었고, 한국이 만약 제3국의 침략 또는 국제적인 간섭을 당할 때에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하여 일본이 전략적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었다.

모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하야시 공사는 반일 지도자들을 한국에서 모두 제거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 1904년 2월 23일, 일본이 한국을 편입하기 약 1년 전에, 일본군대는 “합법적으로” 한국 주둔을 허용 받았다.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공식적인 보호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일본은 실질적으로 한국 주권을 침략하였던 것이다.

위 왼쪽: 러일전쟁 1904년~1905년 동안 일본의 경찰은 한국의 전략 지역에 주둔하였다. 위 사진은 울릉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경찰. 위 오른쪽: 또 다른 도쿄 만화: 이 그림은 “일본인의 알 수 없는 유럽 계급으로의 진입”, Uncle Sam 그리고 John Bul은 서구 열강들로서 만족스런 표정으로 약병을 조사해보고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후에 인쇄된 이 그림은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 동료로서 수용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1870년 – 1905년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결론
19세기 후반 그리고 초기 1900년대 초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해보면, 왜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고 그 후 한국 자체를 강탈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명백히 서구열강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하여 행했던 것처럼 한국을 개항시키려는 전함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

일본이 왜 1905년 독도를 외국에게 통지하지 않고 자국영토로 편입시켰는지는 명확하다. 1900년대 초기 일본의 가장 큰 걱정은 외국의 간섭세력이 군대뿐 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자문관을 철수시키도록 요구하고, 장래 한국에 대한 모든 기회를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서구열강들의 3국 간섭으로 인한 쓰디쓴 경험을 한 일본정부는 무모한 변화로 인한 외국간섭을 피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 속에 두려는 정책을 신중하게 진행시키면서 외국 강대국들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기다렸다.(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다)

1904년 초 역사적 사실로서, 독도를 편입하기 이전, 일본은 한국 문제의 복잡성 가운데서 한국에 강한 발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한국 중앙정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강대국들을 모든 내각의 재정 결정에서 제외시켰다. 이미 일본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수많은 땅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이미 한국 철도, 전신, 전화, 그리고 우편제도의 통제권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1904년 8월 초 일본은 외국 외교 자문관 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하였고, 한국 외무부를 무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러일전쟁이 끝나기 이전에 합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모든 수준의 보호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일본의 다케시마 웹사이트는 1870년~1905년 일본의 한국개입을 기술하면서 기본적 역사 또는 정치적 맥락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그들의 팽창주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몇 몇 일본인들은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그 이전 또는 그 중간에, 합법적으로 땅을 획득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운동은 과거를 밝혀야하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대외정책과 같은 선상에 있다.